산업혁명과 식탁의 변화
Adolph Menzel, The Iron Rolling Mill(Modern Cyclopes), 1872 – 1875년작.
부제 '모던 퀴클롭스'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로마신화에 불과 장인의 신으로 불리는 헤파이스토스의 보조자로서의 대장장이 키클롭스들의 현대화된 모습을 의미한다.
산업 혁명과 인클로져 운동
19세기 말까지 대다수의 농민들은 자급자족을 하는 생활을 하고, 도시의 근로자들은 인근 지역의 농민들로부터 식품을 구매했기 때문에 그들의 식사도 다양성은 부족했다. 산업혁명 이전의 식품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양과 질적인 면에서 다소 부족했고, 소화하기 어려웠으며, 재료를 구해서 조리하기도 힘들었다. 또한 대부분의 식품은 신선하지 않았고 품질도 불량했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질병에 취약했고, 비위생적인 음식들은 영아 사망률을 높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 일용할 양식을 허락한 신께 감사하고 신의 은총을 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산업 혁명과 함께 과학적 농업이 시작됐다. 특히 토지가 부족한 북유럽의 베네룩스(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지역에서 우선적으로 시도되었다. 특히 네덜란드인들은 유기비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통하여 늘 토지를 비옥하게 하였고, 이들의 농법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 도입되어 윤작이 시작되었다. 이제 중세 장원 제도부터 시작된 삼포제 농법은 새로운 근대국가가 주도하는 윤작으로의 변환으로 전환되었다.
1900년대 초반 미국 펜실베이니아 어린 석탄 공들_coal-breakers-in-pennsylvania
16세기부터 네덜란드 지역에서 전파된 기술을 바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영국 면 공업은 르네상스 이후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고, 급증하는 면직물 수요에 따라 대량 생산의 요구에 자극을 받아 면제품의 질과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는 새로운 기계들이 출현하였다.
새로운 산업 발전에 필요한 풍부한 석탄, 철 등의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18세기 말 영국에서 산업혁명의 서막이 열렸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는 석탄연료를 이용한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안전성과 효율성을 개선한 증기기관을 개량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새로운 증기기관이 공장에 보급되어 공장제 기계 공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면직물 공업, 제철공업과 기계 공업에 혁신을 가져왔다. 이에 면직물 공업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산업이 영국에서 발달하였고,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하여 식민국가를 상대로 한 해외무역으로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증기기관의 발명은 기관차와 기선의 발명에 영향을 주어 교통 기관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영국의 스티븐슨이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여 철도 시대의 막을 열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원료와 제품의 빠른 수송을 가능하게 하여 산업 발달을 촉진시켰다. 영국은 산업기계의 발명과 기술의 혁신으로 산업상의 큰 변화와 사회경제적 변화를 끌어냈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영국의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게 되면서 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인클로저 운동(Enclosure)은 산업혁명 시기 목축업의 자본화를 위한 영국에서 공용지의 땅을 사유화하기 위하여 말뚝을 박아 영토를 표시하는 것을 뜻한다. 인클로저 운동과 영국의 산업혁명은 중세 장원 경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 경제인 자본주의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몰락한 중소농들은 농업노동자나 도시 노동자가 되었는데, 이로써 현대 기업가와 지주 계층과 농업노동자와 도시 노동자 계층으로 이루어진 두 계급이 확립되었다.
프리츠 하버의 질소 합성과 농업 생산성의 증대
인클로저 운동으로 국가에 의해서 관리되는 토지의 재분배로 농지가 사유화되자 몰락한 농민을 양산했다. 하지만 국가적으로는 미개간 된 황무지의 개척으로 사료용 작물 재배가 쉬워지고 가축의 생산도 증대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인류의 식량공급원인 농업은 토양의 질소농도에 따라 수확량이 결정되는 한계가 있다. 질소는 매우 안정적인 물질이라 토양에 질소를 충전하는 방법은 콩과 식물을 심거나 반년 정도 농사를 쉬는 휴경지를 운영하는 봉건시대의 삼포제 방법이었다. 콩을 재배하고 삼포제 방식의 휴경으로 토양의 질을 유지하는데 한계가 왔을 때 신대륙으로부터 구아노가 유럽으로 수입되었다. 아메리카 칠레에서 생산되는 구아노(인광석)를 질소비료로 쓸 수 있단 사실이 알려지고 유럽은 몇 해간 풍작을 이어갔다. 구아노는 바다새들의 배설물이 오랜 기간 퇴적되어 만들어진 질산염으로, 구대륙은 칠레로부터 구아노를 수입하여 비료로 사용해 농지에 영양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구아노는 화약을 만들어 내는 군수물자로 전환되고 곧 공급량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구아노로 인한 몇 년간의 풍년 후 찾아온 흉년에 사람들은 기아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공기 중에 존재하는 질소를 인공적으로 농축해 암모니아로 합성,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독일식 교육을 받고 자란 두 유태인, 프리츠 하버와 아인슈타인은 친구였다.
이후, 1913년 프리츠 하버와 카를 보슈는 질소와 수소를 직접 반응시키는 방법으로 암모니아 합성하는 하버 보슈 법(Haber-Bosch process)으로 대량 생산된 암모니아를 산화시켜 질산을 만들었다. 질소 합성법은 프리츠 하버를 유럽의 구세주로 만들었고, '공기로 빵을 만드는 과학자'라는 명예가 그에게 붙었다.
안정적인 질소 공급이 가능해지자 삼포제와 콩 농사, 유럽의 제2의 식량자원인 감자 농사도 필요 없어지고 밀생산량이 기록적으로 증가하였다. 인공 질소비료의 공급 3년 만에 식량 생산량은 인구 증가량보다 두배를 웃도는 수치를 기록하면서 맬서스의 인구론도 사라졌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 생산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정설로 통하던 시대에 프리츠 하버는 1900년대에 16억에서 100년이 지난 지금 70억을 넘기게 하는데 가장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하지만 대량 생산된 질산은 TNT 등 각종 화약의 원료가 되었고 제한된 천연질소 광물인 구아노로 만들던 화약을 값싸게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질소 합성법은 화약을 값싸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제1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킨 유대인이었던 프리츠 하버는 독일에 동화된 은행가인 유대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독일인의 정체성과 삶을 살았다. 비스마르크 이후 통일 독일의 강력한 국수주의자였던 그는 세계 1차 대전 당시 소금(NaCl)을 전기 분해하여 염소가스(Cl2)라는 독사스를 만들어 세계 최초의 화학전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독일인 국수주의자로 살아왔던 프리츠 하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또한 그가 만든 염소가스는 아우츠비츠 수용소에서 사용되며 수많은 유대인이 그의 발명품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독일인 이전에 유대인이었던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캠브리지대학의 교수직을 얻었지만, 영국에서도 그는 이방인이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이자 ‘공기로 빵을 만드는 과학자’인 프리츠 하버는 초라한 말년을 보내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감자의 장려와 증기 제분소의 혁신
근대의 가장 큰 유럽의 식탁의 변화는 신대륙에서 건너온 식물인 감자였다. 냉해에 강한 감자는 18세기 유럽을 강타한 소빙하기를 타고 전 유럽에 퍼져 널리 재배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구황작물 역할을 하였다.
처음 감자는 그저 식물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사소한 관심을 받았을 뿐이고, 이후에는 가축의 사료나 극빈층의 양식으로만 이용되었다. 유럽의 가톨릭 문화는 식재료까지 하늘과 가까울수록 고귀한 취급이 되어 하늘을 나르는 새들이 가장 고귀한 식재료 취급을 받았다. 중세 이후 왕족과 귀족들의 식탁에 항상 공작과 칠면조 같은 조류가 오르는 이유였다. 과일 또한 땅에서 하늘과 가까운 식재료라서 신에 가까운 식재료 취급을 받았고, 땅속에서 자라는 순무, 양파, 마늘 등은 신과 가장 먼 작물로 서민들과 가난한 자들의 식탁에 올랐다.
하지만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대기근이 닥치자 감자의 영양학적 가치를 인식하면서 비로소 감자 농사가 시작되었다. 농민들에게 계몽적인 취지로 감자 생산을 대규모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감자의 재배 범위가 늘어났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감자는 다른 채소에 비해 적은 양의 기름, 크림, 소금만으로도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들에게 훌륭한 식사란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신속히 조리 가능한 것을 의미하였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속하게 메인디쉬로 요리할 수 있으며, 콩류보다 소화도 쉽고 포만감 또한 좋았다. 감자가 지닌 담백한 탄수화물의 맛은 다른 여러 가지 음식들과 곁들여 먹기에도 좋았다. 1850년대에 감자는 빵 다음의 유럽의 주요 식품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특히 청어를 곁들인 삶은 감자는 인기가 많아서 독일을 포함한 북유럽의 가정에 인기가 많았다. 가격이 싼 감자는 많은 사람이 손쉽게 이용 가능한 재료여서 감자와 더불어 주말에는 온 가족이 함께 고깃국, 스튜, 푸딩 등이 포함된 일요일의 정찬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1845년 아일랜드에서 감자 마름병으로 인한 감자 기근이 일어나 아일랜드인들이 대규모로 미국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 굴곡이 있었다. 결국 감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감자의 시대는 다시 프리츠 하버의 질소 생산 덕분에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밀가루와 빵에게 자리를 내준다.
이후 1960년대 식용유와 쇼팅의 생산이 증가하면서 감자는 기름에 튀기는 감자튀김으로 다시 탄생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
호주 퀸즐랜드_Hayes Steam Flour Mills at Warwick.1885
제분소(grist mill)는 곡물을 갈아내서 곡분을 제조하는 곳으로 산업혁명으로 동력이 발전하기 전에는 수력을 이용한 물레방아나 풍력을 이용한 풍차를 제분소의 동력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질소비료를 사용한 농지에서 생산량이 증가한 다량의 밀은 물레방아나 풍차를 이용한 기존의 노동 집약적인 제분 시스템으로 밀가루를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고정식 증기 엔진이 발명되어 제분기와 타작에 사용되는 농업 엔진 역할을 하며, 대형 제분소가 등장하면서 밀가루의 생산량도 늘어났다. 고정식 증기 엔진을 사용한 대형 증기 제분소는 19세기 전체와 20세기 전반에 걸쳐 널리 만들어졌으며 전력 공급과 내연 기관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감소했다. 고정식 증기 엔진을 이용한 제분소의 대량 생산된 밀가루는 이제 유럽의 기아를 해결하면서 빵이 감자의 인기를 잠재우고 서민들도 빵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밀가루의 대량 생산으로 빵의 공급이 풍요로워지자 빵 가격도 하락하여 아침에 오트밀을 해 먹었던 귀리가 마침내 빵에게 아침 식사 자리를 내주었다.
니콜라 아페르의 저장 혁명
산업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우리의 식탁은 식품을 건조하고, 염장을 하거나 훈연한 식품을 먹었고, 식품의 해로운 박테리아를 제거하기 위해 식초와 올리브 오일, 꿀 등에 음식을 넣어 유통기간을 늘리는 형태로 보존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산업혁명은 농업의 발전과 함께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식품 관련 분야 즉 식품 저장기술의 개발, 위생, 가공 및 영양에 관한 지식의 발전으로 식생활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식품의 상업적 가공법이 개발되면서 식품의 저장과 보관에 혁명을 이룩해 수확기의 물량 변동과 변질되는 식품의 주기를 조절함으로써 식품을 안전하게 유통할 수 있었다.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는 나폴레옹의 주문에 따라 발명된 병조림을 발명하였고 그 후 영국에서는 피터 듀란드(Peter Durand)가 석관 제조법을 개발하여 병을 깡통으로 대체한 통조림을 만들어 발전시켜 나갔다.
니콜라 아페르는 프랑스 출신의 제과 업자로, 최초로 병조림을 고안해 내어 "통조림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파리에서 10년간 요리사로 일하면서 식품보존에 중요성을 인식하고 1795년 그는 식품을 보존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1804년에 유리병에 음식을 넣고 코르크로 덮은 후 파리핀으로 밀봉하는 식품 보존법을 발명했다. 니콜라 아페르는 이 병조림을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었던 프랑스군에서 야전용 음식 보존법 공모에 당첨되어 12,000프랑의 상금을 받아내었다. 이후에도 새로운 음식 보존법과 소독법을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가 만든 식품 보존법의 원리는 간단한 원리로 저온 살균을 통해 멸균시킨 후 밀봉하여 세균의 침입을 막는 것이었지만 병조림을 발명한 니콜라 아페르 조차 그가 사망할 때까지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여 병조림을 보관했던 구체적 과학적 원리는 몰랐다.
파스퇴르의 연구와 업적은 현대 생명공학과 식품가공 기술의 문을 열었다.
세균의 존재를 몰랐던 인류는 1800년대 후반 루이 파스퇴르가 효모균과 세균을 살균하는 '파스퇴르화'(pasteurized)를 알아내고 생명공학과 식품공학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발생설을 부정하는 세균을 입증하는데 이천 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는 맥주의 발효 과정에서 효모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했고, 양조의 화학적 과정을 밝혀낸 논문을 발표하였다.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탄저균 배양에 성공하자, 원인균을 배양은 예방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탄저병 백신을 개발하여 질병은 예방할 수 있는 것이란 새로운 개념을 심어주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기술들이 속속들이 등장하자 이를 이용한 식품회사들이 등장하고 음식은 산업화되었다. 음식산업이라는 자유경쟁체재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광고라는 새로운 기술과 접목하여 광범위한 지역으로 식품을 알리고 유통할 수 있었다. 이렇듯 새로운 산업혁명의 기술들은 단 한 세기만에 유럽의 식탁문화와 먹거리에 대한 문화를 확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결핍으로 가득했던 유럽인들의 삶은 현대 자본주의의 소비자로 탈바꿈하게 되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육식하는 유럽으로 발전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농민들은 곡물만을 수확하여 먹거리로 사용하게 되고 목축에 사용되는 밀짚, 옥수수 사일리지 같은 농경 부산물을 얻게 된다. 초식 체류 동물을 위하여 가을에 잉여가치인 밀집과 옥수숫대를 이용한 건초 사료를 모으고 소와 말, 양을 먹였다. 이로써, 겨울철에는 가축을 유목할 필요가 없이 축사에서 농경 부산물을 사료를 이용하여 유효하게 활용하고, 농업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고기와 우유를 얻기 위하여 목축을 병행했다. 고대로부터 유럽은 현대와 같은 옥수수와 귀리 등이 농후 사료로 되기 이전까지는 소죽, 말죽을 밀짚, 콩, 고구마 줄기 등 쓰지 못하는 풀등을 섞어 죽처럼 끓여 먹였다. 전근대 시기의 목축은 고기와 젖으로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었고, 가죽이나 털 등으로 옷을 만들 수 있었으므로 농사만큼이나 중시되었다.
프리츠 하버의 질소비료는 전 유럽에 공급되어 토양에 영양상태를 대폭 개선했다. 이후 농업 생산량이 급증하여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잉여 곡물이 생산되고 동물사료로도 쓸 수 있도록 하는 농후 사료 공급도 늘어났다.
또한 새로 개발된 초식동물 사료인 ‘사일리지(Silage)’는 유럽의 낙농농가들이 동절기에도 소와 양을 대규모 우사에서 사육함으로써 가축의 농업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었다. 사일리지는 겨울철 목초지가 자라지 않는 시기에 소와 양을 먹이는 사료를 보관하는 방법으로 목초가 자라지 않는 겨울철 낙농 가축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발효된' 풀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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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어 크라우트(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만드는 과정과 동일한 기술을 사용하는 사일리지는 가을철 초지에서 잘 자란 녹색의 풀(알팔파, 옥수수, 호밀, 귀리 등)을 밀봉하여 2주간 혐기성 발효를 시킨 후 사료로 쓰였다. 낙농 가축들을 위한 우리나라 가을철의 김장과도 같은 과정인 사일리지 제조는 19세기 초부터 독일에서 개발되어 전 유럽에 기술이 퍼져 나갔다. 또한, 수확량이 증가한 밀을 수확하고 남은 건초인 밀집은 겨울철에도 농가들이 더 많은 소와 양들을 키울 수 있는 먹이가 되었고 유가공식품과 치즈, 육류를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이 얻어 낼 수 있게 하였다.
근대 이전까지의 유럽은 기아와 식품 가격의 상승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그저 하루 먹을 빵을 구하는 일이 삶의 투쟁에서 최우선 순위였다. 고기와 버터, 달걀은 축제 때와 사순절에서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동물성 식품은 언제나 비쌌기 때문에 단백질 식품의 소비는 수입과 사회적 지위와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농업 생산성이 월등하게 높아지고,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 새로운 운송수단이 발달하자 과잉 생산된 시골의 농작물들과 해외의 주요 농산물들이 여러 주요 도시들로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역 네트워크의 확대는 대중적인 식품들과 사치 식품들도 유럽 곳곳에 수송할 수 있고 또한 곡물의 가격도 하락하게 되었다.
제국주의적 유럽은 신세계와 식민지로부터의 새로운 공장 무역 활성화로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상향되어 동물성 식품의 소비가 곡물의 소비를 앞질렀다. 이제 곡물을 소비하는 유럽에서 육식을 하는 유럽으로의 변환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유럽의 식탁에 빵이 오르기 시작하자 귀리와 옥수수의 위치는 돼지의 사료로 전락하게 되고, 돼지고기는 유럽인의 식탁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햄과 온갖 종류의 소시지들이 생산되었다.
사치 식품이 기호식품이 되다_커피와 초콜릿
1800년경의 초기 도시 노동자들은 수입의 70~80%를 식료품비만으로 사용되었다. 여러 가지 증거들을 보면 대부분의 서민 가정에서 사치품은 거의 없었고, 혼합식이나 대용식품으로만 그런 음식을 먹었다. 생활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얼마만큼 배를 채울 수 있는지, 버릴 것이 없이 얼마나 많이 이용할 수 있는지(수율) 구하고 만들기는 쉬운지(사용가치), 값은 얼마인지(교환가치)로만 평가되었다. 그런 다음에 마지막에 맛과 영양가치를 따졌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수혜를 받은 유럽의 몇몇 도시의 서민층들은 농업과 교역의 확장으로 상류층의 인한 잉여 사치품들을 맛볼 수 있었다. 1800년대 후반 대도시의 서민들은 비록 많이 희석된 것이었지만 커피마저 쉽게 아침 식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검고 뜨거운 커피는 아침을 깨우는 자극제로 이용되어 유럽의 아침을 여는 음료의 위치에 오른다.
이교도인 투르크의 음료인 커피는 16세기 베네치아 상인들로부터 유럽에 퍼졌다. 커피 모임은 왕실과 상류 귀족들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도시의 부유한 부르주아지들에게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20세기 초까지도 순수한 커피는 가격이 너무 높아 사치품에 속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미에서 커피가 대량 재배되고 생산되면서 비로소 커피는 일상적인 음료가 되었다.
'판 하우텐 코코아'는 1900년대 초기 산업화된 세계 최대 초콜릿 생산 회사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코코아를 처음 유럽으로 가져왔을 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무엇보다 귀족과 특권 사회의 큰 열풍이 일으켰다. 유럽에 처음 도착한 이국적인 음료인 초콜릿은 수천 년 동안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각성제로 소비하던 음료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인들은 종교행사 및 축제행사에서 코코아로 화상과 부상을 치료하는 데 사용했고 최음제로 사용되었다. 코코아 열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음식과 의류 등 의식주를 거래하는 통화로 사용되었다. 스페인 정복자 헤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és)는 1519년 멕시코에 상륙하고 놀라운 쓴 맛의 이상한 음료를 발견했다. 하지만 아가베 시럽(천연 감미료)이나 꿀을 넣었을 때 맛이 좋아지자 코르테스는 이 놀라운 음료로 부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카카오를 스페인으로 들여온다. 유럽에 초콜릿이 소개된 초기에는 초콜릿은 의학적 목적으로만 쓰였지만 이후로 유럽에서 고품격 음료가 되었고 새로운 음료에 완전히 매료되었으며 귀족과 성직자들도 '초코 마니아'에 입덕 하게 된다
설탕이 흔해지자 프랑스의 설탕 제빵사들은 초콜릿 케이크도 만들게 된다. 코코아는 아즈텍으로부터 온 최음제로서의 명성이 지속되었고 당시 초콜릿은 차와 커피보다 비싼, 커피보다 고급 음료의 위치를 유지했다.
스위스 화학자 앙리 네슬레는 우유에 밀가루를 혼합하여 안정화된 음료용 밀크 초콜릿을 탄생시켰다. 이후 영국군은 마시는 초콜릿을 군대 식량에 포함시켰고, 부자들의 음료에서 일반인들의 일상식으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1900년대에 이르자 마시는 스위스의 초콜릿은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밀크 초콜릿, 초콜릿 바, 스프레드 등 다양한 제품으로 시장에 출시되었다. 동시에 가격은 점차 낮아지고 초콜릿은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초콜릿은 18세기 계급을 상징하던 비싼 식품에서 일반가정 아이들도 먹을 수 있는 평범한 식품이 되었다. 오늘날의 다국적 식품기업인 네슬레는 근대 초기 초콜릿 산업의 성장과 함께한다.
산업혁명 이후 근대의 식탁은 현대 식단으로의 소비습관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프리츠 하버의 질소비료의 생산과 새로운 농업장비와 기계, 새로운 사료기술의 등장한 강화된 축산업 덕분에 식량생산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근대 유럽은 인구학자인 맬서스의 비관적인 이론의 늪에 빠지는 대신 식량 생산은 정비례로 증가하고, 공장에서는 새로운 식품들을 쏟아내게 되어 인구가 폭증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수공업에서 기계를 이용한 대량 생산 방식으로 공장제 기계 공업이 발달하였고, 산업 자본주의가 확립되어 시민들의 경제생활이 윤택해지고 풍족해졌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비위생적인 도시문제가 대두되었고, 임금이나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 아동착취 등으로 인한 노동문제가 발생하였다. 산업 혁명은 임금이 싼 어린이와 여성 노동자가 크게 증가시켰고, 노동자는 하루 14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9세기 초반 영국 면직물 공장에서 일한 18세 이하의 청소년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44%나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인간성 말살의 자본주의 확립을 가져왔고, 산업사회의 노동자의 불만이 거세지면서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러다이트 운동이란 사회 빈민층이 셀 수 없이 많아지자 일부 시민들이 기계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며 사람들을 선동해 기계를 파괴하는 운동이었다. 또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으로 인한 자본론이 탄생하고, 사회주의 사상과 함께 공산주의 국가도 탄생시키는 이념의 시작도 대두되었다.
산업혁명과 식탁의 변화
Adolph Menzel, The Iron Rolling Mill(Modern Cyclopes), 1872 – 1875년작.
부제 '모던 퀴클롭스'는 베르길리우스가 쓴 로마신화에 불과 장인의 신으로 불리는 헤파이스토스의 보조자로서의 대장장이 키클롭스들의 현대화된 모습을 의미한다.
산업 혁명과 인클로져 운동
19세기 말까지 대다수의 농민들은 자급자족을 하는 생활을 하고, 도시의 근로자들은 인근 지역의 농민들로부터 식품을 구매했기 때문에 그들의 식사도 다양성은 부족했다. 산업혁명 이전의 식품은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양과 질적인 면에서 다소 부족했고, 소화하기 어려웠으며, 재료를 구해서 조리하기도 힘들었다. 또한 대부분의 식품은 신선하지 않았고 품질도 불량했다. 그래서 소비자들은 질병에 취약했고, 비위생적인 음식들은 영아 사망률을 높였다. 따라서 사람들은 식탁에 앉아 일용할 양식을 허락한 신께 감사하고 신의 은총을 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근대에 이르러 산업 혁명과 함께 과학적 농업이 시작됐다. 특히 토지가 부족한 북유럽의 베네룩스(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덜란드) 지역에서 우선적으로 시도되었다. 특히 네덜란드인들은 유기비료를 사용하는 방법을 통하여 늘 토지를 비옥하게 하였고, 이들의 농법이 유럽의 다른 지역에 도입되어 윤작이 시작되었다. 이제 중세 장원 제도부터 시작된 삼포제 농법은 새로운 근대국가가 주도하는 윤작으로의 변환으로 전환되었다.
1900년대 초반 미국 펜실베이니아 어린 석탄 공들_coal-breakers-in-pennsylvania
16세기부터 네덜란드 지역에서 전파된 기술을 바탕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영국 면 공업은 르네상스 이후 빠른 속도로 성장하였고, 급증하는 면직물 수요에 따라 대량 생산의 요구에 자극을 받아 면제품의 질과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는 새로운 기계들이 출현하였다.
새로운 산업 발전에 필요한 풍부한 석탄, 철 등의 지하자원을 바탕으로 18세기 말 영국에서 산업혁명의 서막이 열렸다. 제임스 와트(James Watt)는 석탄연료를 이용한 강한 힘을 낼 수 있는 안전성과 효율성을 개선한 증기기관을 개량하는 데 성공한다. 이후 새로운 증기기관이 공장에 보급되어 공장제 기계 공업이 급속히 발달하고 면직물 공업, 제철공업과 기계 공업에 혁신을 가져왔다. 이에 면직물 공업을 중심으로 한 근대적인 산업이 영국에서 발달하였고,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광대한 식민지를 개척하여 식민국가를 상대로 한 해외무역으로 많은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증기기관의 발명은 기관차와 기선의 발명에 영향을 주어 교통 기관에도 혁신을 가져왔다. 영국의 스티븐슨이 증기 기관차를 발명하여 철도 시대의 막을 열었고 이러한 영향으로 원료와 제품의 빠른 수송을 가능하게 하여 산업 발달을 촉진시켰다. 영국은 산업기계의 발명과 기술의 혁신으로 산업상의 큰 변화와 사회경제적 변화를 끌어냈다.
인클로저 운동으로 영국의 농촌 인구가 도시로 이동하게 되면서 산업에 필요한 노동력을 쉽게 얻을 수 있었다. 인클로저 운동(Enclosure)은 산업혁명 시기 목축업의 자본화를 위한 영국에서 공용지의 땅을 사유화하기 위하여 말뚝을 박아 영토를 표시하는 것을 뜻한다. 인클로저 운동과 영국의 산업혁명은 중세 장원 경제를 완전히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 경제인 자본주의를 탄생시키게 되었다. 몰락한 중소농들은 농업노동자나 도시 노동자가 되었는데, 이로써 현대 기업가와 지주 계층과 농업노동자와 도시 노동자 계층으로 이루어진 두 계급이 확립되었다.
프리츠 하버의 질소 합성과 농업 생산성의 증대
인클로저 운동으로 국가에 의해서 관리되는 토지의 재분배로 농지가 사유화되자 몰락한 농민을 양산했다. 하지만 국가적으로는 미개간 된 황무지의 개척으로 사료용 작물 재배가 쉬워지고 가축의 생산도 증대되는 효과가 나타났다.
인류의 식량공급원인 농업은 토양의 질소농도에 따라 수확량이 결정되는 한계가 있다. 질소는 매우 안정적인 물질이라 토양에 질소를 충전하는 방법은 콩과 식물을 심거나 반년 정도 농사를 쉬는 휴경지를 운영하는 봉건시대의 삼포제 방법이었다. 콩을 재배하고 삼포제 방식의 휴경으로 토양의 질을 유지하는데 한계가 왔을 때 신대륙으로부터 구아노가 유럽으로 수입되었다. 아메리카 칠레에서 생산되는 구아노(인광석)를 질소비료로 쓸 수 있단 사실이 알려지고 유럽은 몇 해간 풍작을 이어갔다. 구아노는 바다새들의 배설물이 오랜 기간 퇴적되어 만들어진 질산염으로, 구대륙은 칠레로부터 구아노를 수입하여 비료로 사용해 농지에 영양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구아노는 화약을 만들어 내는 군수물자로 전환되고 곧 공급량이 한계에 다다르게 되었다. 구아노로 인한 몇 년간의 풍년 후 찾아온 흉년에 사람들은 기아의 공포에 시달리게 되었다. 독일의 화학자 프리츠 하버는 공기 중에 존재하는 질소를 인공적으로 농축해 암모니아로 합성, 인공 질소 비료를 만드는 방법을 고안해낸다.
독일식 교육을 받고 자란 두 유태인, 프리츠 하버와 아인슈타인은 친구였다.
이후, 1913년 프리츠 하버와 카를 보슈는 질소와 수소를 직접 반응시키는 방법으로 암모니아 합성하는 하버 보슈 법(Haber-Bosch process)으로 대량 생산된 암모니아를 산화시켜 질산을 만들었다. 질소 합성법은 프리츠 하버를 유럽의 구세주로 만들었고, '공기로 빵을 만드는 과학자'라는 명예가 그에게 붙었다.
안정적인 질소 공급이 가능해지자 삼포제와 콩 농사, 유럽의 제2의 식량자원인 감자 농사도 필요 없어지고 밀생산량이 기록적으로 증가하였다. 인공 질소비료의 공급 3년 만에 식량 생산량은 인구 증가량보다 두배를 웃도는 수치를 기록하면서 맬서스의 인구론도 사라졌다.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식량 생산은 이를 따라잡지 못하게 된다는 맬서스의 인구론이 정설로 통하던 시대에 프리츠 하버는 1900년대에 16억에서 100년이 지난 지금 70억을 넘기게 하는데 가장 크게 이바지하게 된다. 하지만 대량 생산된 질산은 TNT 등 각종 화약의 원료가 되었고 제한된 천연질소 광물인 구아노로 만들던 화약을 값싸게 대량 생산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질소 합성법은 화약을 값싸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길을 열어 제1차 세계대전의 서막을 열기도 했다. 하지만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킨 유대인이었던 프리츠 하버는 독일에 동화된 은행가인 유대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나 독일인의 정체성과 삶을 살았다. 비스마르크 이후 통일 독일의 강력한 국수주의자였던 그는 세계 1차 대전 당시 소금(NaCl)을 전기 분해하여 염소가스(Cl2)라는 독사스를 만들어 세계 최초의 화학전을 일으키게 하였다. 그러나 독일인 국수주의자로 살아왔던 프리츠 하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유대인 박해를 피할 수 없었다. 또한 그가 만든 염소가스는 아우츠비츠 수용소에서 사용되며 수많은 유대인이 그의 발명품으로 목숨을 잃기도 했다.
독일인 이전에 유대인이었던 그는 영국으로 망명하여 캠브리지대학의 교수직을 얻었지만, 영국에서도 그는 이방인이었다. 노벨화학상 수상자이자 ‘공기로 빵을 만드는 과학자’인 프리츠 하버는 초라한 말년을 보내며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감자의 장려와 증기 제분소의 혁신
근대의 가장 큰 유럽의 식탁의 변화는 신대륙에서 건너온 식물인 감자였다. 냉해에 강한 감자는 18세기 유럽을 강타한 소빙하기를 타고 전 유럽에 퍼져 널리 재배되었으며 수많은 사람들의 구황작물 역할을 하였다.
처음 감자는 그저 식물학적 호기심의 대상으로 사소한 관심을 받았을 뿐이고, 이후에는 가축의 사료나 극빈층의 양식으로만 이용되었다. 유럽의 가톨릭 문화는 식재료까지 하늘과 가까울수록 고귀한 취급이 되어 하늘을 나르는 새들이 가장 고귀한 식재료 취급을 받았다. 중세 이후 왕족과 귀족들의 식탁에 항상 공작과 칠면조 같은 조류가 오르는 이유였다. 과일 또한 땅에서 하늘과 가까운 식재료라서 신에 가까운 식재료 취급을 받았고, 땅속에서 자라는 순무, 양파, 마늘 등은 신과 가장 먼 작물로 서민들과 가난한 자들의 식탁에 올랐다.
하지만 18세기 말과 19세기 초에 대기근이 닥치자 감자의 영양학적 가치를 인식하면서 비로소 감자 농사가 시작되었다. 농민들에게 계몽적인 취지로 감자 생산을 대규모로 전환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장려하며 감자의 재배 범위가 늘어났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감자는 다른 채소에 비해 적은 양의 기름, 크림, 소금만으로도 요리를 해 먹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이들에게 훌륭한 식사란 따뜻하게 먹을 수 있는 신속히 조리 가능한 것을 의미하였다.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속하게 메인디쉬로 요리할 수 있으며, 콩류보다 소화도 쉽고 포만감 또한 좋았다. 감자가 지닌 담백한 탄수화물의 맛은 다른 여러 가지 음식들과 곁들여 먹기에도 좋았다. 1850년대에 감자는 빵 다음의 유럽의 주요 식품으로 자리를 잡았는데 특히 청어를 곁들인 삶은 감자는 인기가 많아서 독일을 포함한 북유럽의 가정에 인기가 많았다. 가격이 싼 감자는 많은 사람이 손쉽게 이용 가능한 재료여서 감자와 더불어 주말에는 온 가족이 함께 고깃국, 스튜, 푸딩 등이 포함된 일요일의 정찬을 즐기게 되었다.
그러나 1845년 아일랜드에서 감자 마름병으로 인한 감자 기근이 일어나 아일랜드인들이 대규모로 미국으로 이주하는 결과를 낳기도 하는 굴곡이 있었다. 결국 감자 대기근이 발생하면서 감자의 시대는 다시 프리츠 하버의 질소 생산 덕분에 생산량이 폭발적으로 증가한 밀가루와 빵에게 자리를 내준다.
이후 1960년대 식용유와 쇼팅의 생산이 증가하면서 감자는 기름에 튀기는 감자튀김으로 다시 탄생하여 새로운 역사를 시작한다.
호주 퀸즐랜드_Hayes Steam Flour Mills at Warwick.1885
제분소(grist mill)는 곡물을 갈아내서 곡분을 제조하는 곳으로 산업혁명으로 동력이 발전하기 전에는 수력을 이용한 물레방아나 풍력을 이용한 풍차를 제분소의 동력으로 사용하였다. 그러나 질소비료를 사용한 농지에서 생산량이 증가한 다량의 밀은 물레방아나 풍차를 이용한 기존의 노동 집약적인 제분 시스템으로 밀가루를 만들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때 고정식 증기 엔진이 발명되어 제분기와 타작에 사용되는 농업 엔진 역할을 하며, 대형 제분소가 등장하면서 밀가루의 생산량도 늘어났다. 고정식 증기 엔진을 사용한 대형 증기 제분소는 19세기 전체와 20세기 전반에 걸쳐 널리 만들어졌으며 전력 공급과 내연 기관이 널리 보급됨에 따라 감소했다. 고정식 증기 엔진을 이용한 제분소의 대량 생산된 밀가루는 이제 유럽의 기아를 해결하면서 빵이 감자의 인기를 잠재우고 서민들도 빵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결과로 이어진다.
밀가루의 대량 생산으로 빵의 공급이 풍요로워지자 빵 가격도 하락하여 아침에 오트밀을 해 먹었던 귀리가 마침내 빵에게 아침 식사 자리를 내주었다.
니콜라 아페르의 저장 혁명
산업혁명이 도래하기 전까지의 우리의 식탁은 식품을 건조하고, 염장을 하거나 훈연한 식품을 먹었고, 식품의 해로운 박테리아를 제거하기 위해 식초와 올리브 오일, 꿀 등에 음식을 넣어 유통기간을 늘리는 형태로 보존기술을 발전시켜왔다.
산업혁명은 농업의 발전과 함께 자연과학의 발전과 더불어 식품 관련 분야 즉 식품 저장기술의 개발, 위생, 가공 및 영양에 관한 지식의 발전으로 식생활에서 많은 변화를 가져오게 되었다.
식품의 상업적 가공법이 개발되면서 식품의 저장과 보관에 혁명을 이룩해 수확기의 물량 변동과 변질되는 식품의 주기를 조절함으로써 식품을 안전하게 유통할 수 있었다.
니콜라 아페르(Nicolas Appert)는 나폴레옹의 주문에 따라 발명된 병조림을 발명하였고 그 후 영국에서는 피터 듀란드(Peter Durand)가 석관 제조법을 개발하여 병을 깡통으로 대체한 통조림을 만들어 발전시켜 나갔다.
니콜라 아페르는 프랑스 출신의 제과 업자로, 최초로 병조림을 고안해 내어 "통조림의 아버지"로 알려졌다. 파리에서 10년간 요리사로 일하면서 식품보존에 중요성을 인식하고 1795년 그는 식품을 보존하는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1804년에 유리병에 음식을 넣고 코르크로 덮은 후 파리핀으로 밀봉하는 식품 보존법을 발명했다. 니콜라 아페르는 이 병조림을 나폴레옹 전쟁이 한창이었던 프랑스군에서 야전용 음식 보존법 공모에 당첨되어 12,000프랑의 상금을 받아내었다. 이후에도 새로운 음식 보존법과 소독법을 끊임없이 연구해왔다. 그가 만든 식품 보존법의 원리는 간단한 원리로 저온 살균을 통해 멸균시킨 후 밀봉하여 세균의 침입을 막는 것이었지만 병조림을 발명한 니콜라 아페르 조차 그가 사망할 때까지 세균의 증식을 억제하여 병조림을 보관했던 구체적 과학적 원리는 몰랐다.
파스퇴르의 연구와 업적은 현대 생명공학과 식품가공 기술의 문을 열었다.
세균의 존재를 몰랐던 인류는 1800년대 후반 루이 파스퇴르가 효모균과 세균을 살균하는 '파스퇴르화'(pasteurized)를 알아내고 생명공학과 식품공학의 문이 열리기 시작한다. 고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 발생설을 부정하는 세균을 입증하는데 이천 년의 시간을 필요로 했다. 그는 맥주의 발효 과정에서 효모가 큰 역할을 한다는 것을 처음으로 입증했고, 양조의 화학적 과정을 밝혀낸 논문을 발표하였다. 독일의 세균학자 로베르트 코흐가 탄저균 배양에 성공하자, 원인균을 배양은 예방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 탄저병 백신을 개발하여 질병은 예방할 수 있는 것이란 새로운 개념을 심어주었다.
산업혁명으로 인한 새로운 기술들이 속속들이 등장하자 이를 이용한 식품회사들이 등장하고 음식은 산업화되었다. 음식산업이라는 자유경쟁체재가 만들어지고, 여기에 광고라는 새로운 기술과 접목하여 광범위한 지역으로 식품을 알리고 유통할 수 있었다. 이렇듯 새로운 산업혁명의 기술들은 단 한 세기만에 유럽의 식탁문화와 먹거리에 대한 문화를 확 바꾸어 놓는 계기가 되었다. 결핍으로 가득했던 유럽인들의 삶은 현대 자본주의의 소비자로 탈바꿈하게 되는 새로운 변화를 맞이했다.
육식하는 유럽으로 발전
농경을 주업으로 하는 농민들은 곡물만을 수확하여 먹거리로 사용하게 되고 목축에 사용되는 밀짚, 옥수수 사일리지 같은 농경 부산물을 얻게 된다. 초식 체류 동물을 위하여 가을에 잉여가치인 밀집과 옥수숫대를 이용한 건초 사료를 모으고 소와 말, 양을 먹였다. 이로써, 겨울철에는 가축을 유목할 필요가 없이 축사에서 농경 부산물을 사료를 이용하여 유효하게 활용하고, 농업만으로는 얻을 수 없는 고기와 우유를 얻기 위하여 목축을 병행했다. 고대로부터 유럽은 현대와 같은 옥수수와 귀리 등이 농후 사료로 되기 이전까지는 소죽, 말죽을 밀짚, 콩, 고구마 줄기 등 쓰지 못하는 풀등을 섞어 죽처럼 끓여 먹였다. 전근대 시기의 목축은 고기와 젖으로 영양분을 보충할 수 있었고, 가죽이나 털 등으로 옷을 만들 수 있었으므로 농사만큼이나 중시되었다.
프리츠 하버의 질소비료는 전 유럽에 공급되어 토양에 영양상태를 대폭 개선했다. 이후 농업 생산량이 급증하여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잉여 곡물이 생산되고 동물사료로도 쓸 수 있도록 하는 농후 사료 공급도 늘어났다.
또한 새로 개발된 초식동물 사료인 ‘사일리지(Silage)’는 유럽의 낙농농가들이 동절기에도 소와 양을 대규모 우사에서 사육함으로써 가축의 농업 생산성을 향상할 수 있었다. 사일리지는 겨울철 목초지가 자라지 않는 시기에 소와 양을 먹이는 사료를 보관하는 방법으로 목초가 자라지 않는 겨울철 낙농 가축들이 먹을 수 있도록 하는 '발효된' 풀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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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우어 크라우트(소금에 절인 양배추)를 만드는 과정과 동일한 기술을 사용하는 사일리지는 가을철 초지에서 잘 자란 녹색의 풀(알팔파, 옥수수, 호밀, 귀리 등)을 밀봉하여 2주간 혐기성 발효를 시킨 후 사료로 쓰였다. 낙농 가축들을 위한 우리나라 가을철의 김장과도 같은 과정인 사일리지 제조는 19세기 초부터 독일에서 개발되어 전 유럽에 기술이 퍼져 나갔다. 또한, 수확량이 증가한 밀을 수확하고 남은 건초인 밀집은 겨울철에도 농가들이 더 많은 소와 양들을 키울 수 있는 먹이가 되었고 유가공식품과 치즈, 육류를 이전 시대보다 훨씬 더 많이 얻어 낼 수 있게 하였다.
근대 이전까지의 유럽은 기아와 식품 가격의 상승이 생활의 일부분이 되어 그저 하루 먹을 빵을 구하는 일이 삶의 투쟁에서 최우선 순위였다. 고기와 버터, 달걀은 축제 때와 사순절에서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었다. 동물성 식품은 언제나 비쌌기 때문에 단백질 식품의 소비는 수입과 사회적 지위와 불가분의 관계였던 것이다.
하지만 근대 이후, 농업 생산성이 월등하게 높아지고, 철도와 증기선의 발명으로 새로운 운송수단이 발달하자 과잉 생산된 시골의 농작물들과 해외의 주요 농산물들이 여러 주요 도시들로 운반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역 네트워크의 확대는 대중적인 식품들과 사치 식품들도 유럽 곳곳에 수송할 수 있고 또한 곡물의 가격도 하락하게 되었다.
제국주의적 유럽은 신세계와 식민지로부터의 새로운 공장 무역 활성화로 생활수준이 전반적으로 상향되어 동물성 식품의 소비가 곡물의 소비를 앞질렀다. 이제 곡물을 소비하는 유럽에서 육식을 하는 유럽으로의 변환되기 시작하게 된 것이다.
유럽의 식탁에 빵이 오르기 시작하자 귀리와 옥수수의 위치는 돼지의 사료로 전락하게 되고, 돼지고기는 유럽인의 식탁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며 햄과 온갖 종류의 소시지들이 생산되었다.
사치 식품이 기호식품이 되다_커피와 초콜릿
1800년경의 초기 도시 노동자들은 수입의 70~80%를 식료품비만으로 사용되었다. 여러 가지 증거들을 보면 대부분의 서민 가정에서 사치품은 거의 없었고, 혼합식이나 대용식품으로만 그런 음식을 먹었다. 생활수준이 낮았기 때문에 얼마만큼 배를 채울 수 있는지, 버릴 것이 없이 얼마나 많이 이용할 수 있는지(수율) 구하고 만들기는 쉬운지(사용가치), 값은 얼마인지(교환가치)로만 평가되었다. 그런 다음에 마지막에 맛과 영양가치를 따졌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수혜를 받은 유럽의 몇몇 도시의 서민층들은 농업과 교역의 확장으로 상류층의 인한 잉여 사치품들을 맛볼 수 있었다. 1800년대 후반 대도시의 서민들은 비록 많이 희석된 것이었지만 커피마저 쉽게 아침 식탁에 오를 수 있게 되었다. 검고 뜨거운 커피는 아침을 깨우는 자극제로 이용되어 유럽의 아침을 여는 음료의 위치에 오른다.
이교도인 투르크의 음료인 커피는 16세기 베네치아 상인들로부터 유럽에 퍼졌다. 커피 모임은 왕실과 상류 귀족들로부터 시작하여 점차 도시의 부유한 부르주아지들에게 유행처럼 퍼져나갔다. 20세기 초까지도 순수한 커피는 가격이 너무 높아 사치품에 속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남미에서 커피가 대량 재배되고 생산되면서 비로소 커피는 일상적인 음료가 되었다.
'판 하우텐 코코아'는 1900년대 초기 산업화된 세계 최대 초콜릿 생산 회사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아메리카 대륙에서 코코아를 처음 유럽으로 가져왔을 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무엇보다 귀족과 특권 사회의 큰 열풍이 일으켰다. 유럽에 처음 도착한 이국적인 음료인 초콜릿은 수천 년 동안 남아메리카의 원주민들은 각성제로 소비하던 음료였다. 스페인 사람들이 도착했을 때, 아즈텍인들은 종교행사 및 축제행사에서 코코아로 화상과 부상을 치료하는 데 사용했고 최음제로 사용되었다. 코코아 열매는 아메리카 대륙에서 음식과 의류 등 의식주를 거래하는 통화로 사용되었다. 스페인 정복자 헤르난 코르테스(Hernan Cortés)는 1519년 멕시코에 상륙하고 놀라운 쓴 맛의 이상한 음료를 발견했다. 하지만 아가베 시럽(천연 감미료)이나 꿀을 넣었을 때 맛이 좋아지자 코르테스는 이 놀라운 음료로 부를 얻을 수 있음을 깨닫고 카카오를 스페인으로 들여온다. 유럽에 초콜릿이 소개된 초기에는 초콜릿은 의학적 목적으로만 쓰였지만 이후로 유럽에서 고품격 음료가 되었고 새로운 음료에 완전히 매료되었으며 귀족과 성직자들도 '초코 마니아'에 입덕 하게 된다
설탕이 흔해지자 프랑스의 설탕 제빵사들은 초콜릿 케이크도 만들게 된다. 코코아는 아즈텍으로부터 온 최음제로서의 명성이 지속되었고 당시 초콜릿은 차와 커피보다 비싼, 커피보다 고급 음료의 위치를 유지했다.
스위스 화학자 앙리 네슬레는 우유에 밀가루를 혼합하여 안정화된 음료용 밀크 초콜릿을 탄생시켰다. 이후 영국군은 마시는 초콜릿을 군대 식량에 포함시켰고, 부자들의 음료에서 일반인들의 일상식으로의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1900년대에 이르자 마시는 스위스의 초콜릿은 산업의 발전으로 인해 밀크 초콜릿, 초콜릿 바, 스프레드 등 다양한 제품으로 시장에 출시되었다. 동시에 가격은 점차 낮아지고 초콜릿은 일상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초콜릿은 18세기 계급을 상징하던 비싼 식품에서 일반가정 아이들도 먹을 수 있는 평범한 식품이 되었다. 오늘날의 다국적 식품기업인 네슬레는 근대 초기 초콜릿 산업의 성장과 함께한다.
산업혁명 이후 근대의 식탁은 현대 식단으로의 소비습관으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프리츠 하버의 질소비료의 생산과 새로운 농업장비와 기계, 새로운 사료기술의 등장한 강화된 축산업 덕분에 식량생산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근대 유럽은 인구학자인 맬서스의 비관적인 이론의 늪에 빠지는 대신 식량 생산은 정비례로 증가하고, 공장에서는 새로운 식품들을 쏟아내게 되어 인구가 폭증하는 시대를 맞이했다.
수공업에서 기계를 이용한 대량 생산 방식으로 공장제 기계 공업이 발달하였고, 산업 자본주의가 확립되어 시민들의 경제생활이 윤택해지고 풍족해졌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비위생적인 도시문제가 대두되었고, 임금이나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 아동착취 등으로 인한 노동문제가 발생하였다. 산업 혁명은 임금이 싼 어린이와 여성 노동자가 크게 증가시켰고, 노동자는 하루 14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9세기 초반 영국 면직물 공장에서 일한 18세 이하의 청소년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44%나 되었다. 영국의 산업혁명은 인간성 말살의 자본주의 확립을 가져왔고, 산업사회의 노동자의 불만이 거세지면서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러다이트 운동이란 사회 빈민층이 셀 수 없이 많아지자 일부 시민들이 기계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며 사람들을 선동해 기계를 파괴하는 운동이었다. 또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으로 인한 자본론이 탄생하고, 사회주의 사상과 함께 공산주의 국가도 탄생시키는 이념의 시작도 대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