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주차. 고대 그리스 시대_도시화의 맛

고대 그리스 시대_도시화의 맛 


신들의 나라 그리스


서구 문명의 두가지 축은 그리스도교의 영향과 그리스 로마시대의 문명이다. 그중에서도 서구 문명의 시작은 기원전 그리스 도시 국가로부터  시작되었다.

프랑스의 역사학자 페르낭 브로델(Fernand Braudel)은 그의  저서 물질문명과 자본주의에서 문명의 4가지 기둥을 설명한다. 문명이 탄생하기 위해서는 공간과 사회가 생겨나고, 경제와 문화가 공간과 사회 안에 생겨나면 문명을 이루게 된다고 설명한다. 문명이란 위의 4가지 기반 위에 문화적 산물과 다양한 학문적 견해들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면서 이루어지는 다양성의 집합체이다. 이를 대입해 보면 그리스는 유럽과 지중해의 최초이자 가장 뛰어난 문명이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서양 미술과 조각, 고전 문학과 연극 등 모든 분야의 문화 예술에 영향을 미치고, 아직도 수많은 서구 영화들의 많은 스토리와  캐릭터들과 연관되어 있다. 그만큼 고대 그리스의 문화적 영향은 서양문화의 발전의 토대에 서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대 그리스 문명은 통일된 제국으로 존재하지 않았고 다도해로 이루어진 발칸반도에 위치한 500여 개의 크고 작은 도시문명들이었다. 도시에서 생활하는 시민계급(귀족)과 평민, 농노로 구성된 완전한 계급사회의 폴리스라고 불리는 도시는 그리스 문명의 바탕이었다. 자신들을 제외한 이민족에게는 바르바로이(barbaroi)라고 칭하고, 문화적으로 격이 다른 존재라 생각했다. 또한 거주지역에 따라 계급을 만들고 공간적, 사회적, 정치적 격차뿐아니라 도덕적 격차까지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고대 그리스는 신들의 나라였기에 신화가 존재하고 신전이 도시마다 존재했다. 올림피아에는 제우스 신전이 있고, 아테네에는 우리가 아는 파르테논 신전(아테나를 모시는 신전)이 있다. 델포이 신탁으로 우리가 들어왔던 델포이 신전은 신들 중에서도 가장 잘생겼다는 예언을 담당하는 태양신 아폴론을 모시는 신전이었다. 그리스 철학의 선구자인 소크라테스도 자기가 관심 없는 질문을 할때는 델포이 신전으로 가서 아폴론 신에게 물어보라고 할 정도였다 한다.  고대 그리스를 탐색하기 위해서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철학적 계보를 알아보면 된다. 지적인 면에서도 피타고라스가 학교를 세우고, 유클리드가 학설을 발표하며, 아르키메데스가 탄생할 정도로 수학과 기하학에도 수준이 높았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인 일리아스 오디세이아는 유럽인들에게 이후로의 문학과 사고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고, 현대의 문학과 영화의 소재로 끊임없이 등장한다.

파르테논 신전은 기원전 447년에 지어진 고대 아테네의 수호자로 여겨지던 아테나 여신에 봉헌된 그리스 아테네의 신전이다.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두 도시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철학과 수학 그리고 남성적 육체의 아름다움을 탐닉하는 도시였다. 특히 스파르타의  어린 남자아이는 7살부터 20세가 될 때까지 기숙 생활을 하며 혹독한 성인식을 치러내고 30세가 돼서야 기숙사를 나와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한편 아테네는 시민으로 태어난 아이들은 일리아스와 오디세이를 암송했고, 류트 연주와 춤도 필수 교양과목으로 이수한다. 12세가 되면 팔레스트라라는 체육훈련장에서 육체를 단련해야 하기도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나체 차림이 자연스러웠는데 대부분의 남자들은 간단한 읽기와 쓰기를 연습하고 나머지 시간은 나체의 벌거벗은 몸으로 육체를 단련했다. 고대 그리스인은 단련된 인간의 균형 잡힌 육체만큼 아름다운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건전한 육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는 믿음이 있었다. 고대 그리스 조각상들의 나체의 아름다운 육체들은 미화되거나 과장되지 않은 그 시대의 생활상을 보여준다. 요새가 아닌 평원의 돌 투성이의 발칸반도의 도시 국가를 지키려면 튼튼한 신체는 필수였다. 그것이 고대 올림픽이 시작된 이유일 것이다. 고대 올림픽은 제우스에게 바쳐진 신전인 올림피아 신전이 완성되는 날 시작되었다. 고대 올림픽은 기원전 776년 개최되어 총 292회, 1169년 동안 개최되면서 부흥하다가 그리스도교가 권력을 잡기 시작한 AD.393년에 폐지되었다. 그리스도교인들은 그리스 신화의 제우스를 비롯한 여러 다신교신들을 찬양하는 체육대회를  좋아하지 않았으며 또한  나체를 과시하며, 경쟁하는 것도 반기지 않았다. 심지어 파르테논 신전의 수많은 아름다운 조각들도 나체라는 이유만으로 그리스도 교인에 의해 훼손되었다.   

그리스와 로마 사이에는 아드리아해가 있다. 그리스는 겨울에는 비가 내리고 여름에는 엄청난 햇빛이 내리쬐기 때문에 올리브나 포도를 재배하기 적합하고 바위틈에 자라는 풀을 먹여 양이나 산양을 키울 수 있었으며 주식인 밀의 생산성은 낮았다. 에게해는 수평선이 펼쳐지는 바다가 아닌 다도해로, 수많은 섬들이 있어 평소에는 잔잔한 바다인 탓에  육로로 교역하는 것보다 배를 만들어 자유로운 해상교역이 활발했다.

그리스의 요리 관습은 문명인의 필수 생활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신들의 세 가지 선물, 올리브 오일과 빵 그리고 와인이었다. 올리브 오일은 아테나 여신으로 받은 선물이었으며 와인은 디오니소스 신으로부터 받은 넥타르(신의 음료)였고 빵은 데메테르 여신이 준 암브로시아(신의 음식)의 하나였다.  



맷돌과 올리브 오일


고대 올리브 오일은 식용이 아닌 의약품으로 사용되었으며, 일반 기름에 비해 발화점이 낮아 등불을 밝히는 용도로 쓰였다. 올리브가 대량 생산되기 전까지는 올리브 오일은 상당히 고가의 귀중품이었는데 올리브 나무가 잘 자라기 위해서는 태양의 강렬한 빛과 많지 않은 강우량이 지중해성 기후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기원전 1500년경부터 올리브나무가 자라기 가장 좋은 장소인 고대 그리스의 크레타와 키프로스, 그리고 본토에서 올리브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올리브가 대량 생산되면서 올리브와 올리브 오일은 고대 지중해 식단의 중요한 구성 요소였을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시대에 가장 성공적인 산업 중 하나로 성장한다.  도시국가로 구성된 그리스의 무역이 중동과 북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확산되면서 올리브 오일은 가장 큰 무역상품이 되었다. 올리브는 문화적으로 중요한 식품이 되었으며, 올리브유는 부의 상징이자 고가의 귀중품으로 등극하게 된다. 지방은 에너지를 저장하여 오랜 기간 사용할 수 있게 해 주고 추위나 상처로부터 몸을 보호하기도 한다. 지중해의 올리브에는 풍부한 양질의 지방이 충분히 들어 있다. 갓 수확한 잘 익은 올리브를 만지면  기름기가 많은 것을 바로 느낄 수 있는데, 살짝 눌러보면 기름이 흘러나올 정도다. 왜 고대 그리스 사람들이 올리브에서 기름을 추출할 생각을 했는지 이해가 간다.

클라조메나이(Klazomenai)에서 발견된 기원전 6 세기 올리브 오일 추출 설비 복원 시설

고대 그리스인들은 식물성 지방인 올리브유를 말을 이용하여 짜낼 수 있는 거대하고 멋진 맷돌을 고안해 낸다. 맷돌은 흔히 우리가 알고 있는 돌절구 두 개가 회전하여 곡식을 분쇄하는 ‘로터리 밀(rotary mill)’ 맷돌과 원통형으로 이루어진 돌 바퀴를 동물을 이용하여 돌리는 ‘사이더 밀(cider mill)’  맷돌로 나뉜다.  로터리식 맷돌은 일반적으로 사암이나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둥글넓적한 돌 두 개를 포개고, 위쪽에 뚫린 구멍으로 갈 곡식을 넣으며 손잡이를 돌려서 갈게 된다. 이에 반해 사이더식 맷돌은 과실류의 즙을 착즙 하기 위한 목적으로 분쇄하는 데 사용되는 장비이다. 사이더식 맷돌은 일반 로터리 맷돌에 비해 규모가 커서 이를 구동하기 위해 말이나 소등의 가축을 이용했다. 사이더 맷돌의 구동 원리는 바닥에 원형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돌덩어리 길을 러너(runner)라고 불리는 돌 바퀴가 회전운동을 하는 구조이다.  바퀴의 바깥쪽에 말을 매달아 원을 그리며 천천히 걸으면 원통형의 러너가 올리브를 분쇄하여 포마지(pommage)라고 불리는 펄프 덩어리를 제외한 올리브유를 착유하게 된다. 올리브유를 짜내고 난 올리브 포마지는 특히 돼지의 사료로도 사용되어 돼지의 사육도 증가되었다. 인류 최초의 소시지 이야기가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에 언급되는 것을 보면 당시에 돼지의 사육도 일반화됨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도시 클라조메나이(Klazomenai)에서 인류 최초의 사이더식 맷돌이 고안해 올리브를 분쇄하고 오일을 착유했다. 큰 러너 돌을 쌍으로 사용하여 압력과 효율을 높여 올리브유를 착유했으며, 이후 더 높은 압력과 무게를 가하기 위해 더 큰 규모와 효율이 높은 사이더식 맷돌들이 그리스 전역에 설치되었다.  

올리브 오일 산업은 식물성 기름을 대량으로 생산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각광을 받았으며, 올리브유를 산업화하기 위한 부가 산업들이 성장하였다. 이때 올리브나무 과수원을 위한 수로가 개발되었으며, 대량 생산된 올리브유를 보관하기 위한 코린토스의 흑회도자기 산업이 부흥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와 같은 올리브 산업은  올리브유를 수송하기 위한 선박 갤리선의 발전을 이끌기도 하며, 올리브유는 고대 그리스와 헬레니즘 문화의 발전을 이끄는 견인차 역할을 한다. 로마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상업적인 올리브 재배단지가 조성되고 올리브와 올리브유는 지중해식 식단에 빠질 수 없는 식문화의 정점이 된다.

올리브중 칼라마타 올리브라고 불리는 그리스 칼라마타 지역의 특산품인 올리브가 있다. 이곳은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두 번째로 인구가 많은 도시로 올리브의 땅이라 불린다. 칼라마타 올리브는 아몬드 모양의 알이 실하고 통통하고 진한 자주색의 올리브이다. 칼라마타 올리브는 올리브의 진정한 참맛을 느낄 수 있다.

올리브유가 불포화 지방산 비율이 높아 건강한 기름으로 인식되어있지만, 포화 지방산의 비율이 1/6 정도 함유되어 있다. 너무 많이 섭취하면 현대의 그리스인처럼 될 수도 있다. 2000년대 들어 유럽에서 비만율이 가장 높은 나라는 그리스이다.



오븐의 발명 - 다양한 빵을 만들다   


쌀은 도정과정을 거쳐 껍질을 벗겨 바로 밥을 지어먹을 수 있지만, 밀은 껍질을 벗기기 어려운 구조로 밀을 가루로 만들어야만 껍질을 분리할 수 있었다. 밀의 껍질(밀기울층)은 마른 가죽과 같은 특성을 가지기 때문에 수분을 공급하여 밀기울층을 부드럽게 만들어 밀을 분쇄할 때 이층을 부서뜨리지 않고 유지시켜서 순수한 밀가루를 분리하고 껍질을 걸러내야 했다.  순수한 밀가루에 물을 부으면 밀가루 입자 사이의 풀 역할을 하는 단백질인 글루텐에 의해 엉기면서 밀가루 반죽이 된다. 밀은 이렇게 껍질을 벗길 수 없기 때문에 밀가루로 빵을 만들어 먹는 것은 필연이었다.

빵을 굽는 과정인 베이킹은 일반적으로 오븐에서 건조한 뜨거운 열기를 사용한다. 물과 소금으로 반죽을 하고 효모에 의한 반죽의 발효과정 즉, 부풀림 과정을 거친다.  발효된 반죽은 성형이라는 과정 빵 모양을 잡는 과정을 거치고 2차 발효 과정을 거친 후 뜨거운 오븐 안에서 구워진다. 오븐은 빵의 표면에서 점진적으로 열을 전달하여 열이 통과됨에 따라 바삭하게 구워진 빵껍질과 부드러운 안쪽의 빵의 질감을 만들어낸다. 겉은 바삭하고 빵 안쪽의 촉촉한 식감을 원하는 제대로 된 빵을 만들기 위해서는 제빵용 오븐은 필수적인 조리기기이다. 이집트에서도 고기를 굽거나 빵을 구울 수 있는 오븐의 흔적을 찾을 수 있지만, 빵을 굽기 위한 오븐은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발전되고 오븐 바닥과 돔이 있는 최초의 전면 오븐에 빵 반죽을 넣은 것은 그리스인들이 최초였다.

발효빵이 최초로 만들어진 곳은 고대 이집트로, 호메로스의 기록을 보면 다양한 이집트 빵이 등장한다. 하지만 빵 굽기의 역사를 바꾼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이었다. 제임스 모건의 저서 요리 창조(Culinary Creation, 2012)에 의하면 기원전 기원전 5세기경 고대 그리스에서 빵 굽기를 위한 전면 오븐이 발명되었다고 전해진다.

고대 그리스의 작가 아테네우스는 당시의 연회를 기록한 '철학자들의 향연'이란 저서에서 기원전 5세기 아테네 사람인 테아리온은 빵을 굽는 화덕을 개발했으며, 상업용 빵집까지 세웠다고 전했다. 테아리온 이후로 고대 그리스인들은 빵에 새로운 기술과 영혼을 불어넣고 그들의 조각과 같이 탁월한 기술을 접목하였는데 아테네우스 책에 의하면 70여 가지가 넘는 빵의 종류를 열거한다. 또한 빵은 신들을 위한 제물로 가난한 이들에게 돈이 없어 값비싼 산제물로 바치지 못하는 이들이 동물 형태로 굽거나 자신의 소망을 새겨 구운 빵을 신들을 위한 제물로 바쳐졌다.

Clay-Oven in acient greek

고대 그리스 시절부터 통밀 빵보다는 체에 고른 고운 밀가루로 만들어 구운 하얀 빵을 최고의 맛으로 선호했다. 당시의 제빵사들은 밀가루에  와인, 우유, 치즈, 꿀 등의 다양한 재료들을  넣어 빵의 점도와 향기를 달리 했다. 또 올리브 오일이나 돼지 지방을 첨가하기도 했다고 전해지며 아마씨나 참깨 등을 넣기도 하고 건포도를 사용했다고 한다. 오늘날 우리의 빵과 많이 다르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오븐을 만들어 빵을 만들기 시작하고 다양한 반죽과 여러 가지 모양과 다양한 기술이 접목된 빵을 만들어 냈다.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빵은 좀 더 전문적이고 훈련된  직업인으로서의 제빵 장인들을 탄생시켰고, 가정에서 구워진 빵이 아닌 상점에서 파는 형태로 발전시켰다.


현대의 그리스 올림푸스 해변에서 쏟아지는 지중해의 태양 아래 바다를 마주하고 화이트 와인 한잔이 테이블에 놓여있다. 곧 맛있는 그리스 빵과 치즈, 최고급 압착 올리브 오일과 그리스 칼라마타 지방의 싱싱한 올리브가 서브된다. 맛있는 그리스의 정통적인 점심식사이다. 고대 그리스도 현대와 다르지 않아 고대 그리스인들의 미각적 취향은 소피스트들의 엄격함으로 소박함을 기본으로 한다.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소크라테스가 공정한 사회의 음식에 관하여 논하는 장면이다. '싱싱한 나무 위의 빵 덩어리와 와인, 올리브 오일과 치즈, 소금과 갖가지 종류의 채소'를 말하며 이 정도 음식이면 사치스럽지 않은 음식이라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고기위주의 식단과 귀한 음식, 금과 상아, 향수와 고급 매춘부 그리고 고급 예술 그림과 장식품들에 대한 탐욕은 전쟁과 부정한 사회를 낳는다는 앞날을 예고한다. 고대 그리스나 현대나 별반 다르지 않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암포라(amphora)의 등장과 향연(Symposium)의 탄생


암포라(amphora)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로마 시대까지 널리 쓰이는 항아리로 2개의 손잡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타원형으로 불룩하게 나온 형태로 항아리 목부분에서 몸통에 걸쳐 2개의 손잡이가 있고, 뚜껑이 있다. 본래 포도주나 올리브유 등을 담는 그릇이지만 곡식이나 물고기의 운반과 저장에도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암포라는 와인과 포도주를 보관하기 위한 저장용기로 사용되었지만, 고대 아테네 일상생활의 식재료였던 생선이나 조류 등을 운반하기 위한 저장용기로도 암포라는 활발히 거래되었다. 따라서 고대 그리스의 모든 도시는 암포라를 필요로 했다. 특히 코린토스 지역의 암포라는 아름답기로 유명했다.  코린토스의 항아리는 그리스인들의 운동경기와 전사들을 그려 넣은 아름다운 항아리였다. 아테네도 이를 본받아 검은색 바탕에 붉은색으로 그림으로 역동적인 인간을 묘사한 고대 그리스식의 암포라를 생산해 낸다. 암포라를 통해 여러 도시와 교역을 한 코린토스는 그리스 타 여느 도시국가보다 많은 배를 소유했다. 이를 통해 코린토스 암포라들은 그리스 전역과 중동과 동방에까지 교역을 하기에 이른다.  그리스인들은 암포라에 와인과 올리브유를 가득 싣고 론강을 따라 중부 유럽까지 교역을 확장했다. 암포라 무역은 강과 바다에 의한 수로와 지중해 바닷길의 발전을 이끌었고,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 3개 대륙의 교차점으로서의 역할을 하며 학문과 기술, 새로운 발명품들의 교환을 촉진했다. 암포라의 등장과 무역으로 지중해의 각각의 문명들은 성장하기 시작하고 중요한 자원에 접근하거나 무역로를 통제하고 지배권을 가지기 시작하면서 도시 국가들은 국가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코린토스 암포라(amphora)와 카일릭스(kylix)

암포라의 등장과 함께 2급 신이었던 술의 신인 디오니소스는 포도주가 담긴 암포라와 더불어 아테네 시민의 신으로 격상했다. 스포츠는 제우스에게 헌정되었고, 악기 연주와 시는 아테나 여신에게 헌정되었고 그리스의 연극은 술을 마시는 행위로 인하여 연극은 디오니소스에게 헌정되었다. 고대 그리스들은 카일 릭스(kylix)라는 와인잔에 술을 마셨는데 수평인 2개의 손잡이를 얕은 사발 모양의 질그릇 술잔이다. 그리스 시대의 식사 형태인 향연을 위해 만들어진 것으로 통상 안팎 양면이 섬세하게 장식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다. 보통은 도자기로 되어 있지만 상류층을 위한 도금과 은으로 만들어진 제품들은 현대에도 그 아름다움에 감탄을 자아낸다.

와인은 모든 그리스 식단의 일부분으로 당시에는 꿀 같은 맛을 내는 달콤한 와인을 상당히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들의 음식인 암브로시아(Ambrosia)와 함께 신들의 음료인 넥타르(Nectar)는 꿀과 같은 맛을 지닌 단맛이 나는 음료였다고 생각되면서 달콤한 와인이 유행이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와인과 함께 그들의 독특한 연회 문화인 향연(Symposion)을 만들었다. 심포지엄은 오늘날에는 토론회 정도로 해석되지만 본래는 ‘함께 마시다’라는 뜻을 지녔다. 고대 그리스의 향연은 사회적 지위를 가진 성인 남자들이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 식사를 하며 와인을 마시며 대화하는 형식을 지칭한다. 여성들은 와인을 금하였기 때문에 향연은 오로지 남성들을 위한 자리였다. 이러한 침대에서 누워서 식사하는 관습은 로마에까지 이어졌다. 대개의 심포지온에서는 시중을 드는 미소년들, 고급 매춘부, 무희와 악사들이 함께 했다.

연회에 관한 특정한 묘사는 서간문 형태로 써서 보내는 특정 문학 장르로 존재하기도 했다. 아테네우스의 '철학자들의 향연'은 연회를 불참한 친구에게 연회의 상세한 모습들을 서술하는데 연회에 나왔던 비싼 음식과 술, 여자와 파티, 춤과 게임 등이 주제로 많은 사람들이 가십처럼 읽었다고 한다. 아테네우스의 작품은 헬레니즘 시대의 미각적 취향을 전해준다.    

그리스 소피스트들과 사상가들은 이 향연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이야기했는데, 그 내용을 제자들이 기록한 것이 향연을 주제로 한 대화편으로 남아있다. 플라톤의 작품 ‘향연’은 소크라테스와 소피스트들의 사랑에 대한 대화를 남긴 내용이다.

향연과 같은 잔치와 멋진 식사는 고대 그리스 사회부터 사회적 활동의 한 형태 자신들의 부와 권위를 과시하는 시간과 공간이었다. 아름다운 암포라에 담긴 와인과 올리브 오일, 금과 은로로 장식된 카일릭스, 비싼 식재료와 보기 드문 먹을거리 등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드러내려 했다. 맛있고 없음의 미각적 취향보다 그 시대에 맞는 희귀하고 값비싼 식재료들이 식탁에 올라오는 문화는 고대 그리스 시대나 현대의 최고급 레스토랑과 같다.  고대와 중세 현대에 이르기까지의 미각적 취향은 시대를 불문하고 맛과는 관계없이 희소적이고 귀한 식재료와 현대 기술이 접목된 트렌드와 유행에 가깝다는 것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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