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식의 발전과 현대 식탁의 다양성
20세기에 들어서자 식품 생산의 산업화와 더불어 진행된 세계화는 기존의 요리 관습에 대한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은 여전히 하나의 표준으로 전 세계를 지배했다. 고급 관광업의 성장과 근대 레스토랑의 폭발적인 증가는 요리의 다양성이 전 세계에 퍼지는 효과를 불러오고, 가정요리에까지 침투되어 부자들만의 전유물이던 레스토랑의 고급 음식들은 평준화되어 서민들의 식탁에도 오르게 되었다.
19 세기말까지 증기선, 철도 및 자동차를 통한 운송의 발전으로 여행에 변화가 생기면서 프랑스의 레스토랑은 영국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으로 퍼졌다. 미국에 레스토랑이 상륙하자 식당은 외식과 관련된 모든 포괄적 개념을 합쳐놓은 새로운 구조의 체인 레스토랑인 외식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체인 레스토랑들은 미국의 노동자들의 식사와 외식을 대체하면서 표준화되고, 전문적이고 조직화된 기술로 발전해 나갔다. 체인 레스토랑은 도시의 다운타운과 야구장, 축구장 그리고 컨벤션 센터, 고속도로 휴게소, 학교까지 미국의 모든 장소에 세워졌다. 외식의 다양성으로 인해 여러 국가의 음식들이 체인 레스토랑을 통해 소개되었고, 새로운 미각이 소개되었다. 새로운 체인 레스토랑들은 음식을 맛보기 위한 쾌적한 환경을 제공했고, 위생적이고 안전한 공간에서 영양가 높고 건강한 음식을 제공했다.
핫도그 웨곤에서 핫도그를 사 먹는 아이들(1947년), 과거에는 레드 핫(Red Hot)이라고 불렸다.
농업생산성의 증가와 식품가공기술의 발달로 주식 곡물과 육류, 해산물의 가격이 하락했다. 1890년 독일의 통계학자 에른스트 엥겔은 ‘가계 수입이 높아질수록 식품 소비 비율은 더 낮아진다’는 하나의 사회법칙을 발견했다. 오늘날 서유럽의 식료품비 지출은 총수입 대비 15%로 2차 대전 이전인 엥겔 계수 50%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하얗고 속은 부드러우며 겉은 바삭한 바게트류는 고급의 식품이었지만, 2차 대전 이후에는 서민들의 일상화된 식탁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현대 많은 인류는 기아와 배고픔의 고통보다는 비만과 너무 많은 영양 섭취를 고민하는 인류가 되었다.
산업적 식품보존기술의 진화로 식재료를 냉장 냉동 식품군과 신선식품군으로 나뉘었고, 자국에서 생산된 식재료가 아니어도 진공포장법과 급속냉동법등의 방법으로 전 세계에서 수입되었다. 조리법 또한 조리 기구와 기기의 발달, 즉 모든 가정용 및 산업용 기구들 가스레인지와 전기레인지, 마이크로웨이브 기술을 접목시킨 전자레인지, 푸드 믹서와 식품가공기술을 통한 전 처리된 식재료들이 가정에 침투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현대 식재료들은 콜드체인 시스템 안에서 냉장 냉동되어 진공포장 혹은 밀폐 포장되어 적정한 분량으로 재단되어 알맞은 인원수대로 유통된다.
그리고 현대의 음식에 관한 관점은 양분화되어 가정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가정식과 간편식, 그리고 미식적인 측면에서 최고급 레스토랑들은 명품 사치 산업에 편입되고 운영되어, 유명 셰프들은 대중들의 샐럽으로 존재하고 있다.
20세기, 새롭고 다양한 조리 기기의 발전을 이루다
초기 전자레인지는 높이 1.8m에 무게는 340kg의 주방전용기기로 설계되어 주방 냉장고와 나란히 설치할 수 있도록 벽면 유닛 설치 형태로 개발되었다.
전자레인지(마이크로 웨이브)
물질을 가열하기 위한 고주파 무선파의 이용은 1920년경 개발되고, 1930년대에는 의학적 치료법으로 발전했다. 근대 의학 기술은 완성되지 못한 기술들의 적용으로 전기 충격과 전자파를 환자에게 투여함으로써 치료 효과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진정한 조리 기술을 위한 전자레인지 기술의 등장은 193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로 웨스팅 하우스사가 10kW, 60 MHz 단파 송신기에 부착된 두 개의 금속판 사이에서 음식 조리를 시연했다. 1945년, 미국 공학 엔지니어인 퍼시 스펜서(Percy Spencer)가 고전력 마이크로파 빔의 ‘가열 효과’를 발견하면서 전자레인지의 특허를 출원하고, 1947년 최초의 상용 전자레인지인 라다 레인지(Radarange)를 제작 판매했다. 높이 1.8m에 무게는 340kg의 주방전용기기로 설계되어 주방 냉장고와 나란히 설치할 수 있도록 벽면 유닛 설치 형태로 개발되었다.
스펜서의 라다 레인지로 요리할 수 있는 첫 번째 음식은 팝콘이었다. 음식을 마이크로파 에너지로 상자에 넣었을 때 음식의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기는 했지만 조리용으로는 적합하지 않고, 음식을 다시 데우기에는 적합했다. 초기의 크고 무거운 라다 레인지의 가격은 1947년 당시 미화로 5000달러로 팝콘과 음식을 다시 데우는 용도로 사용하는 기계로는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으며, 전기도 상당히 소비를 많이 했다. 이후 1955년 1300달러대로 가격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크고 무거우며 가격이 비싼 ‘팝콘 기계’는 소비자에게 외면을 받았다.
일본의 전자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본 샤프(Sharp)사는 1961년에 새로운 전자레인지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1964년에 샤프는 턴테이블을 갖춘 최초의 소형 가종용 전자레인지를 출시하고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1970년 미국의 산업용 전자레인지는 4만 대였으나 1975년에는 100만대로 증가했고, 당시 전자레인지 시장은 7억 5천만 달러로 추정되었다.
1970년대 후반, 기술 발전으로 샤프는 저렴한 가정용 전자레인지를 제조하여 1980년대 전자레인지 시장의 급속한 확장을 이끌었다. 1980년대에 샤프와 같은 일본 회사들이 지배한 전자레인지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제조업체들 이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삼성은 주요 전자레인지 제조업체가 되었다. 이전에는 대규모 산업 응용 분야에서만 발견된 전자레인지는 점차 선진국의 가정 주방의 필수 가전이 되었다. 1971년의 선진국 가정 1%에서 전자레인지를 소유했지만, 1986년까지 선진국 가정의 약 25%가 소유했고, 현재는 선진국 가정의 98%가 전자레인지를 소유하며 83% 인구가 전자레인지를 매일 사용한다고 한다.
믹서(블랜더)
스테판 폽로스키(Stephen J. Poplawski)와 그의 초기 믹서 모델
스티븐 일렉트릭사의 소유주 인 스테판 폽로스키(Stephen J. Poplawski)는 1919년에 아놀드 전기와 계약을 맺고 맥아 밀크 셰이크를 만들기 쉽도록 믹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1922년에 음료수 믹서를 특허를 받았으며, 1930년대에 해밀턴 비치(Hamilton Beach Company)사는 폽로스키의 새로운 발명품인 밀크셰이크용 믹서를 제작했다. 해밀턴 비치 사는 밀크 셰이크용 믹서를 개선하여 여러 종류의 믹서기를 만들어 믹서기를 가정에 보급했다.
1937년에 스무디를 대중화한 웨어링 블렌더(warning Blendor)가 출시된다. 웨어링 블렌더는 잘 깨지지 않는 견고한 유리용기로 유명한 파이렉스(Pyrex) 유리 용기를 믹서 교반기 부분으로 제작하여 믹서를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1937년에 바이타 믹스(Vitamix)사는 warning에서 사용하는 유리 재질의 파이렉스 대신 기능적으로 스테인리스 용기가 있는 강화 믹서기‘더 블렌더(The Blender)’라는 제품을 출시하면서 이때부터는 믹서는 ‘블렌더’로 불리게 된다.
1946년 또 하나의 유명한 블렌더 제조 회사인 오스터(Oster) 사가 오스터라이저(Osterizer)라는 상표로 상용화한 자체 믹서기를 개발했다.
1949년 바이타 믹스 사는 최초의 믹서기를 텔레비전에서 광고했다. 빵가루, 팬케이크 반죽, 과일음료 및 디저트 음료를 만드는 데 블렌더를 사용하면 편리하다고 광고했다.
스무디와 셰이크, 음료수 제조 및 음식 준비를 위한 블렌더가 인기를 끌면서 블렌더는 주방에서 필수적인 주방 보조기구로 존재하고 있다.
무쇠 냄비의 보급과 튀김요리의 증가
‘더치 오븐’(뚜껑이 단단히 고정된 무쇠냄비)과 튀김용 기름이 흔해지자 감자튀김이 유럽에서 유행되었다.
세계의 식문화에는 튀김과 관련하여 자체 역사가 있지만 ‘튀김’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이전까지는 흔하지 않았다. 일본은 에도시대인 1600년대에 밀가루 반죽에 묻혀 튀긴 채소와 해산물로 구성된 가장 오래된 튀김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서양에서는 1800년대 후반 산업혁명으로 제철의 공급량이 확장되면서, 무쇠(주철) 조리기구가 널리 보급되었다. 내구성이 뛰어나고 보온성이 뛰어난 소재인 무쇠는 조리 기구로써의 무쇠냄비와 무쇠 프라이팬을 만들었고 ‘더치 오븐’(뚜껑이 단단히 고정된 무쇠냄비)을 만들어 냈다. 또한 식물성 유지에 수소결합 기술로 인한 튀김용 기름이 흔해지자 튀김이라는 조리기술이 유럽에서 유행되었다.
각 가정에도 보급되는 무쇠 솥과 저렴한 튀김용 유지, 유럽의 주식 감자의 만남은 유럽에서 빵 다음으로 많이 소비되는 가장 유명한 음식인 ‘프렌치프라이(감자튀김)’을 탄생시켰다. 가장 단순하고 대표적인 패스트푸드라고 생각하는 감자튀김은 사실 가장 현대적인 요리 접근 방식인 튀김으로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만들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튀김 조리법은 인기를 얻으며 세계각지역의 많은 튀김음식을 탄생시켰고, 특히 미국 남부의 프라이드치킨과 영국의 피시 앤드 칩스등으로 발전했다.
18세기 후반에 발명된 감자튀김이 유럽에서 대인기를 끌면서, 1860년 죠셉 마린(Joseph Malin)은 런던 최초의 ‘피시 앤 칩스’ 레스토랑을 열었다. 튀김은 19세기에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 남부에서 무쇠솥의 인기와 더불어 현대에도 볼 수있는 튀김 요리가 많이 개발되었다. 19세기 중반에 도넛이 발명되었으며, 양파링, 프라이드치킨, 콘도그와 같은 음식은 모두 20세기 초에 발명되었다. 그리고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의 성장으로 튀긴 음식, 특히 감자튀김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사일런트 커터
The meat chopping machine, seydelmann, 1886
19세기 중반부터 독일인 이민자들이 미국에 유입되면서 미국의 요리 관습에 독일 음식도 착색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음식이 소시지였다.
도살된 가축의 남은 고기와 육류 부산물을 장에 채워 조리한 소시지의 역사는 이집트 시대에 벽화로도 남아 있기도 하며, 고대 중국부터 로마시대까지 인류에게 오래된 음식의 역사로 전해 내려온다. 독일은 소시지에 있어서 소시지 순결법(bratwurst purity law, 1432년)을 정할 정도로 소시지 생산 관리에 관하여 엄격한 법률을 제정한 소시지를 사랑하는 나라이다.
독일 소시지가 세계화된 것은 독일 이민자들의 소시지가 미국에 퍼진 이유도 한 몫하겠지만, 독일의 세계 최초의 육가공 기계 생산 회사인 세이델만(Seydellmann)의 역할도 중요했다. 독일의 알렌 지방에서 안드레아 세이델만이 창립한 회사인 세이델만은 농업기계를 만드는 회사로 출발한다.
이후, 안드레아의 아들 루이스 세 에델만은 세계 최초의 meat chopping machine(고기 분쇄기)를 발명하고, 육가공 기기 제작 사업을 시작한다. 기계공학자 출신인 루이스 세이델만의 지휘 아래 세이델만 사의 육가공 기계들은 발전을 거듭하여 1910년 세계최초로 분당 800회전을 할 수 있는 소시지 '유화 작용(emulsification)'이 가능한 소시지를 생산할 수 있는 육가공기계 '보울 커터(Bowl Cutter)'를 개발했다.
물과 기름이 섞이는 현상을 식품업계에서는 유화 작용(emulsification)이라 하는데, 유화가 잘 되기 위해서는 물과 지방 단백질을 완벽하고 빠르게 섞어줄 수 있는 기계가 필요했다. 소시지 보울 커터(Bowl cutter)는 당시에는 혁신적인 기기로 단백질과 지방, 물을 빠른 속도로 섞어 고운 반죽으로 유화시켜 현대적인의 '유화형 소시지'를 생산하게 했다.
세이델만은 정육점을 중심으로 한 가내 수공업식의 소시지 산업을 현대 육류 가공의 기계화된 공장형 소시지 업체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언 박람회에서 '핫 도그(Hot Dog)'가 데뷔를 하면서 소시지는 더욱더 미국 음식의 중심에 편입되어 미국의 대형 마트 체인의 역사와 함께 소용돌이치며 진입한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각 지역의 슈퍼마켓과 정육점에서 팔리던 소시지들이 대형 마트 체인의 발전과 함께 대형 마트에 필요한 소시지를 공급할 전국적인 유통망을 지닌 거대 소시지 회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육가공 기계와 기구의 발전과 식품첨가물의 발달, 대형 마트라는 거대 유통망의 탄생은 소시지의 초 대량 생산이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독일 이민자들의 음식이었던 소시지는 공장 생산화된 엄청난 생산력과 함께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에 가장 유명한 육가공 식품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2018년 현재 세계 최대의 소시지 회사는 미국의 소시지가 탄생한 위스콘신주에 위치한 존슨빌 소시지(Johnsonville sausage)로 세계 최대의 소시지 회사답게 매일 3400마리의 돼지를 도살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식사 공장, 외식 프랜차이즈의 발명
20세기 초반 레스토랑 산업이 커지면서 주방은 노동 집약형 생산시설로 변해갔다. 직업적인 셰프는 물론이고 가정주부들도 새로운 요리 체계에 순응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새로운 중산층을 형성한 사무직과 도시 노동자들이 레스토랑에 바라는 것은 속도와 청결이었다. 그에 따라 전통적인 레스토랑의 구성요소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레스토랑은 웨이터가 식사를 전달하고 식사를 마치면 계산서를 들고 오는 형태의 전통적인 레스토랑 서비스를 셀프서비스와 계산대에서 돈을 내는 형식의 셀프서비스로 변화했다.
프랜차이즈는 1900년대 중반에 새로운 유형의 프랜차이즈가 소매 및 패스트푸드 체인의 형태로 등장했을 때 더욱 유행을 거두었다. 당시의 교외로의 이동과 베이비 붐의 출현으로 도시 외곽의 더 먼 지역에서 패스트푸드 및 소매 체인이 개발되어야 하므로 이러한 유형의 비즈니스를 프랜차이즈 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프랜차이징 모델은 고객에게 균일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여 성공적인 비즈니스 운영을 위한 공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효과적이었다. 프랜차이즈 본사에게 필요한 자본을 제공하고, 유통 채널을 만들고, 소비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표준과 더 높은 인식 가치를 제공했다. 비즈니스 소유자, 운영자 및 고객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모델이었다.
안전하고 현대적이며 살균된 백색의 성(White Castle)이라는 환경에서 음식을 준비했음을 고객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두 조각의 빵 사이에 제공되는 고기 패티로 합쳐진 현대 햄버거가 탄생했다. 위스콘신주의 시모어(Seymour)와 오하이오주의 애크런(Akron)을 포함하여 미국 햄버거의 출생지라고 주장하는 주가 여러 곳 있다. 가장 오래된 햄버거 가게는 화이트 캐슬(White Castle) 햄버거로 1921년 설립하여 미국 최초의 패스트푸드 버거 체인을 만들었다. 세균의 발견, 건강과 위생의 연관성으로 인해 청결에 대한 강조 되면서 20세기 초 화이트 캐슬 레스토랑은 흰색 인테리어를 적용했다. 안전하고 현대적이며 살균된 백색의 성(White Castle)이라는 환경에서 음식을 준비했음을 고객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청결함과 위생적인 인테리어의 표준은 계속 이어져 현대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으로도 이어졌다. 청결함과 표준화된 서비스를 갖춘 화이트 캐슬 버거는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햄버거도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전적인 패스트푸드 햄버거는 대부분 맥도널드의 CEO인 레이 크록(Ray Kroc)에 기인한다. 맥도널드는 햄버거의 대명사이기도 하고 외식 프랜차이즈의 시작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미식의 변방 미국에서 간 고기를 구워 빵에 쌓아먹는 수많은 샌드위치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레이 크록은 햄버거를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노동 집약적이고 생산이 쉽고, 저렴한 햄버거를 미국인들이 먹는 방식으로 바꾸어 외식 프랜차이즈 업계에 혁명을 일으키고 전 세계에 미국식 햄버거를 수출했다.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난 레이 크록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 차세계 대전에서 댄스 밴드 음악가, 세일즈맨, Lily-Tulip 종이컵 및 접시 대표, 그리고 나중에 그의 구급차 운전사였다. 그 후, 밀크셰이크 혼합기의 판매원 일을 하게 된다.
1954년, 크록은 맥도널드 형제의 캘리포니아 샌 버나디노의 작은 햄버거 가게를 방문했는데, 그가 발견한 것은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 샌드위치를 생산하는 전문 노동 시스템이었다. 헨리 포드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 개념에서 힌트를 얻은 McDonald 형제는 숙련도가 낮은 직원을 고용하여 가장 빠르고 저렴한 음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맥도널드 형제는 햄버거를 '요리'하는 주방이 아닌 '조립'하는 주방으로 변형시켰다. 형제들은 음식을 효율적이고 저렴하게 제공하는 데 성공했지만 프랜차이즈에는 능숙하지 않았다. 레이 크록은 McDonald의 콘셉트에서 1954년에 형제들의 잠재력을 보았고, 이를 프랜차이즈화 하고, 이 새로운 공식은 패스트푸드 체인의 선례가 되어 미국 식당의 풍경을 바꾸었다.
맥도널드가 창업한 그해, 1956년 미국의 '연방지원 고속도로 법'이 제정되고, 6600km의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고속도로 근교 상업지구와 주택 건설붐이 일어났다. 레이 크록은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미국의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마다 맥도널드 매장을 오픈하였다.
새로운 인터체인지가 생기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고 새로운 도시에는 청교도의 나라답게 미국의 개신교 교회가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면서 만남의 장소도 요구되었다. 매장 근처의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와, 맥도널드 햄버거는 모임의 장소가 되면서 맥도널드의 황금 아치는 ‘천국의 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신도시가 세워지면 교회와 맥도널드는 자연스럽게 한 세트로 세팅이 되어가면서 햄버거와 맥도널드는 미국 식문화의 주류로 떠오른다.
레이 크록은 일명 'turn-key system' (일괄수주계약 : 맥도널드 매장을 표준화하여 교육된 매니저가 Key가 되어 열쇠만 돌리면 매장을 가동할 수 있는 상태로 인도하는, 자동차의 개념으로 설계하고 판매하는 시스템)를 도입하고 지점을 미국 전역에 확산시켜 맥도널드의 파운더(설립자)가 된다. 레이 크록은 맥도널드를 '햄버거를 파는 매장'이 아닌 '맥도널드 지점을 파는 부동산업'의 주식회사로 탈바꿈시켰다. 레이 크록은 프랜차이즈 지점을 짓기 위해 토지를 구입 한 다음 장기임대로 프랜차이즈에게 부동산을 임대했다. 이후, 레이 크록은 자동차를 팔듯이 맥도널드 매장을 판매하기 시작하고, 햄버거를 파는 것이 아닌 햄버거 생산수단을 판매하는 프랜차이즈 기업으로서의 맥도널드로 성장시킨다. 조지 리처는 ‘맥도널드 그리고 맥도널드화’에서 맥도널드식 프랜차이즈화의 4대 요소인 효율성과 계산 가능성, 예측가능성 그리고 통제로 규정했다. 이런 4가지 요소들은 외식 프랜차이즈의 표준이 되고, 새로운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들이 탄생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KFC, 도미노 피자, 크리스피 크림 도넛 등 모든 외식 프랜차이즈들은 맥도널드식 기법을 모방하게 되고, 식문화의 변방이자 외식문화의 후발주자였던 미국을 단번에 세계 최고의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 수출국으로 변모시킨다.
2018년 집계로 맥도널드 햄버거의 판매량은 650억 개의 햄버거를 판매한 것으로 추정했다. 맥도널드는 미국 전체 감자 작물 생산량의 7.5 %를 구매한 것으로 추정되며 식품업계의 큰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핫박스를 만들어 배달의 혁명을 일으킨 도미노 피자
피자 도우 위에 토마토소스가 토핑 된 현대적인 피자의 역사는 콜럼버스가 토마토를 유럽에 소개하고 유럽인들이 토마토가 관상용 식물이 아닌 농작물로 작물 화된 시기인 18세기부터이다. 이태리 나폴리에서 피자는 주방이 아닌 길거리에서 만들어져 팔리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아는 피자의 시작으로 거리의 노점상도 발전하여 건물에 점포를 얻어 Pizzeria(피제리아)로 발전한다. 1889년 이탈리아의 여왕 마르게리타가 나폴리를 방문할 때 그녀의 이탈리아 통일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나폴리의 피자 장인 라파엘 에스포지토가 이탈리아 국기색인 레드, 화이트, 그린(토마토, 모짜렐라 치즈, 바질)으로 장식된 피자 인 "피자 마르게리타 (Pizza Margherita)"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음식이었던 피자는 19세기 후반부터 수많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농민들이 대거 미국 이민자로 유입과 미국 안에서 이탈리안 커뮤니티가 발전하면서 미국에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1960년 최초의 도미노 피자는 폭스바겐 비틀 차량으로 완성된 피자를 배달하는 형식으로 시작했다.
프랜차이즈가 발달하면서 피자 역시 프랜차이즈화 되기 시작한다. 특히 도미노 피자(Domino pizza)는 외식메뉴에서 매장이 필요치 않은 Pizza Delivery system(피자 배달 시스템)으로 발전시킨다. 1960년 최초의 도미노 피자는 폭스바겐 비틀 차량으로 완성된 피자를 배달하는 형식으로 시작했다.
도미노 피자의 로고에 세 개의 점은 이때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처음에 3개의 지점을 뜻하던 로고 안의 점은 지점이 늘어날 때마다 하나씩 점을 늘리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이처럼 소박한 포부에서 시작한 지점 수는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나 로고의 점으로 점포의 수를 표현하고자 했던 아이디어는 취소되었다. 현재 도미노 피자의 총 매장 수는 1만 6천 개로 빨간 박스 안에 점이 만 육천 개가 있다고 상상해 보면, 점 세 개인 도미노 피자 로고가 좋은 결정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핫 박스'와 '30분 보증제'로 대표되는 도미노 피자는 새로운 피자 딜리버리 시스템으로 승승장구했다. 배달 전화부터 POS system(Point of sales System, 판매시점 정보관리) 도입하여 초단위로 주문과 생산시간을 줄이고 핫 박스를 도입함으로써 식지 않는 따끈한 피자를 배달했다. 피자 상자가 처져서 피자치즈가 상자 윗면에 눌어붙는 걸 방지하는 삼각대를 피자 가운데에 설치하는 아이디어, 30분 이내에 배달이 완료되지 않을 경우 피자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지금 생각해도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을 피자에 이식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외식 프랜차이즈 시장은 포화에 이르렀다. 많은 프랜차이즈 가맹 본부들은 성공적인 외식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지원하고 운영하는 것보다 가맹점 판매에만 더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레드오션화 된 프랜차이즈 시장에 외식에 대한 철학과 새로운 기술이 없는 돈벌이 만을 위한 외식 프랜차이즈들의 도전은 쉽지 않았다. 몇몇의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는 파산했고 수많은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이 폐점하면서, 프랜차이즈 시스템은 나쁜 평판을 얻었다. 이러한 관행의 결과로 프랜차이즈에 대한 투자는 투기 투자로 간주되었다. 현대 프랜차이즈 법률이 개발되었고 연방법 및 주법 모두 프랜차이즈에 관한 규정이 공포되었다. 2018년 미국의 노동 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에 따르면 미국인 가정은 1년에 3,154 달러를 외식에 소비하는데, 한 달에 258달러로 아직도 미국 식당 업계가 계속 영업이 잘되고 있는 이유이다.
냉동식품과 콜드 체인 시스템의 탄생
Clarence Frank Birdseye 1886~1956
클라렌스 버즈 아이는 미국의 발명가이자 기업가로 현대 냉동식품 산업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미국 농업부에서 근무하던 그는 캐나다 북동부의 레브라도(Labrador) 지역에서 동물 조사 프로젝트 일을 하고 있었다. 북극과 가까운 추운 지역의 레브라도에는 많은 이누이트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어느 날 버즈 아이는 원주민들로부터 물고기를 급속하게 얼리는 법을 배웠다. 이때 그는 캐나다 북동부 레브라도의 추운 날씨인 영하 40°C의 날씨에서 잡은 물고기가 급속 냉동되고 나서 해동될 때 신선한 맛을 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미국의 뉴욕에서 판매되는 냉동 해산물이 래브라도의 냉동 생선보다 품질이 낮다는 것을 이로써 즉시 인식했다. 그는 급속냉동 법이 식품의 보존과 품질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존의 시간 동결 방법은 일반적으로 고온에서 수행되었으므로 동결이 훨씬 느리게 발생하여 얼음 결정이 자라는 시간이 길어졌다. 급속 동결은 더 작은 얼음 결정을 생성하여 조직 구조에 대한 손상을 덜 발생시켰다.
1922년 버즈 아이는 자신의 회사인 Birdseye Seafoods Inc. 를 설립하여 영하 43°C에서 냉장 생선 필렛(생선살)을 냉동했다. 하지만 1924년에 그의 회사는 냉동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 부족으로 파산했다. 같은 해에 그는 냉동식품에 대한 기술을 포기하지 않고 상업적으로 가능한 빠른 냉동을 위한 완전히 새로운 프로세스인 압력 동결법을 개발하고 1925년 General Seafood Corporation을 세웠다. 그의 발명은 오늘날 냉동식품 산업의 시작이었고, 1927년에는 육류, 가금류, 과일 및 채소를 급속 냉동하는 과정을 확장했다.
1929년, Birdseye는 회사와 특허를 2,200만 달러에 골드만 삭스에 매각했다. Birdseye는 회사와 계속 협력하여 냉동식품 기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냉동 육류와 시금치, 완두콩, 다양한 과일과 굴 등을 포함하여 26 개의 품목을 새로운 냉동기술로 냉동식품산업을 개척했다. 냉동식품 덕분에 많은 식품들을 다른 대륙까지 운송할 수 있게 되었고, 지구 반대편에서 수확된 신선한 음식을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소비자들은 버즈 아이의 새로운 냉동제품을 좋아했으며 오늘날 이것은 냉동식품의 탄생으로 간주된다.
프레데릭 존스(Frederick McKinley Jones)는 냉장장치를 개발하고 장착해 최초의 냉장 트럭을 발명하고, 특허를 취득했다.
미네소타 교통 회사의 해리 워너는 1938년 5월 목요일 뜨거운 햇살 아래 친구들과 골프를 즐겼다. 그러나 그가 클럽 하우스로 돌아왔을 때 워너의 좋은 분위기는 한통의 전화로 즉시 망가졌다. 미네소타 트럭 중 하나가 시카고로 가는 도중에 고장 났고, 오늘날 1억 원 정도에 해당하는 생닭이 트럭에서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닭고기를 포함한 육류는 도축장에서 냉장창고까지 즉, 공급자와 소비자의 운송거리 과정을 컨테이너에 얼음으로 차갑게 온도가 유지되어 운송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얼음이 햇볕에 녹으면서 트럭의 온도가 상승하여 당시의 신선 식품들을 운반하던 컨테이너는 부패 사고가 흔히 발생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시로 향하는 멜론으로 가득 찬 철도 차량은 5톤의 얼음으로 포장되어 11일 동안 여러 번 4톤의 얼음을 보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음 보충 시기를 놓쳐서 멜론이 모두 부패하고 뉴욕시에서 멜론의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다.
해리 워너는 냉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업이 망할 것 같다며 불평 섞인 농담을 건넸고, 그날 골프를 치던 친구인 조 누메로는 해리 워너에게 트럭에 냉장고를 달아야 한다고 농담으로 말했다. 그러나 해리 워너는 알루미늄 트럭을 구입하여 조 누메로에게 가져왔다.
조 누메로는 영화 음향 관련 엔지니어링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프레데릭 존스(Frederick McKinley Jones)라는 엔지니어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었다. 조 누메로 역시 장거리 운송을 처리할 수 있는 견고한 냉장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고 프레데릭 존스에게 찾아가 문제를 상의했다. 조 누메로는 냉장 탑차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프레데릭 존스는 트럭에 들어가서 몇 가지 측정을 수행한 후 냉장 장치를 개발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프레데릭 존스는 몇 주 후, 장거리 운행의 충격을 견딜 수 있는 냉장장치를 개발하고 장착해 최초의 냉장 트럭을 발명하고, 특허를 취득했다. 연료로 구동되는 엔진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어 이동식 냉동 압축기를 가동하고 이를 통해 신선식품은 생산 지점에서 소비자에게까지 차갑게 유지되었다. 조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와 파트너십을 맺고, 기존의 음향 관련 엔지니어링 회사를 매각하고 새로운 회사인 ‘US Thermo Control Company’를 창립했다. 이 획기적인 발명품은 냉동식품, 대형 슈퍼마켓 및 현대식 레스토랑 산업의 시대를 열었다. 1940년대에 최초의 냉장 박스카는 운송비용을 절감하여 신선한 농산물을 대중에게 보다 널리 보급하고 저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냉장 운송으로 계절에 관계없이 전국 어디서나 신선한 농산물을 배달할 수 있었다. 당시 냉장 트럭과 냉장 기차는 ‘농장에서 포크로’라는 구호와 함께 콜드 체인(냉장 운송)의 개념을 만들었다. 그들의 회사는 1949년까지 연간 매출은 300 만 달러에 달했다.
프레데릭 존스는 냉장 차량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1943년 Model-C 냉장고 트럭의 특허를 받았고, 이 모델-C 차량은 냉장 차량으로 인기를 얻으며 2차 세계 대전에서 의료 장비와 혈액을 운송하는 데에도 사용되어 수많은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US Thermo Control Company’는 후에 ‘Thermo King Corporation’의 전신으로 현대에도 냉장 냉동 운송산업에서 친숙한 이름이자 여러 기여를 한 기업으로 남아있다.
Thermo King은 냉장 제품 운송에만 국한되지 않았는데, 이 회사가 발명한 또 하나의 제품은 쇼핑 카트로 당신이 구매한 냉장식품을 차량 트렁크에 넣기 쉽도록 운반해준다.
대형 슈퍼마켓의 출현
식품의 새로운 포장 기술인 콜드 체인은 식품의 저장을 연장하고 장거리 운송을 가능케 하는 식품 산업의 핵심 구성 요소이다. 그리고 새로운 식품가공 기술들은 음식을 완성품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식재료를 세분화하고, 각 부위별 포장과 무게를 표준화했다. 새로운 식품 포장 기술은 허들 기술(Hurdle Technology)을 탄생시켜 신선식품의 보존성을 과거에 생각지도 못하는 기간만큼 연장시켰다. 허들 기술이란 품질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미생물들이 극복할 수 없는 장애 조건(식품 보존료, 설탕을 이용한 당장, 소금을 이용한 염장, 탈수, 식초를 이용한 고산도, 고농도 보존료, 극단적 열처리, 냉동처리)을 여러 번 제공하여 식품의 저장성을 향상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전처리 식품들은 결과적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작업을 제거함으로써, 식품 피라미드의 최종 단계에 요리사나 소비자들이 서게 된다. 식품 피라미드의 최종단계에 서게 됨으로써 요리는 재료를 씻어서, 가열하고 차려내기만 하는 과정으로 단축되었다.
음식을 먹기 위해 과거의 시간보다는 하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한 많은 시간이 단축되었고, 최종 단계인 직접 먹는 행위만을 영위하면서 요리에 필요한 여러가지 중간 과정이 생략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식품을 얻기 위해 소비자들은 들판을 나가거나 사냥터나 목장을 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대자본으로 운영되는 대형 식품회사의 육류와 곡류, 대기업의 유통망 속에 거미줄처럼 이어진 슈퍼마켓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Astor_Market_demonstrating_coffee_in_Manhattan_in_1915
대규모 경제에 의해 작동되는 대형 식품 마켓의 개념은 빈센트 아스터(Vincent Astor)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현대 슈퍼마켓의 전신인 뉴욕의 아스터 마켓(Astor Market)으로 1915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고급 백화점의 음식 판매 전략으로 초기에는 고객이 카운터 앞에서 원하는 식품을 이야기하면 카운터 뒤 선반에서 판매자가 제품을 가져왔다. 대부분의 음식과 상품은 개별적으로 소비자가 원하는 무게와 크기로 정확한 양을 측정하고 포장해야 했다. 물건을 살 수 있는 고객의 수는 상점에 고용된 직원 수만큼 제한되었다. 이러한 관행은 본질적으로 느리고 노동 집약적이어서 상당히 비쌌다. 아스터 마켓은 고기와 과일, 농산물 및 꽃을 판매하는 쇼핑몰로 원거리 고객도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당시의 교통수단으로는 원거리 고객을 유치하는 것은 어려웠으며, 결국 1917년에 아스터 마켓은 문을 닫았다.
Kings Checkout Worker의 1960 사진
셀프서비스 식료품점의 개념은 기업가 클라렌스 사운더(Clarence Saunders)가 피글리 위글리(Piggly Wiggly) 마켓에서 1916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클라렌스는 자신의 매장에 셀프서비스 아이디어에 대해 다수의 특허를 받았다. 클라렌스의 셀프서비스 마켓은 성공했으며 프랜차이즈화 하여 지점을 만들었고 이후, 크로거(Kroger)와 세이프웨이(Safeway)등의 대형 셀프서비스 마켓이 등장했다.
미국 최초의 슈퍼마켓이 1930년 뉴욕의 퀸즈 자메이카에 있는 6,000평방 피트(180평 정도)의 차고를 개조하여 마이클 제이 컬렌(Michael J. Cullen, 1884–1936)에 의해 개설되었다. 마이클 제이 컬렌은 ‘King Kullen’ 체인의 창업자로 미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현대 슈퍼마켓의 발명가로 인정받고 있다.
컬렌은 1919년에 당시의 식료품 판매 체인점인 크로거(Kroger)에 입사하여 1930년까지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슈퍼마켓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했다. 그는 Kroger 회장에게 편지를 써서 저렴한 가격, 더 큰 쇼핑 공간, 현금 판매, 제한적 배달 서비스 및 주차장이 많은 임대료가 적은 지역에 초점을 맞춘 지점 등 현대의 대형 마켓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식품점을 제안했다. 컬렌은 제안서에서 새로운 유형의 매장이 크로거의 매장의 수익의 10배를 달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컬렌의 편지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는 것을 확신하고 크로거를 그만두고 미국 동부 뉴욕의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자신의 매장을 시작했다. 컬렌은 번화한 쇼핑가에서 몇 블록 떨어진 퀸즈(Queens)의 모퉁이에 빈 차고를 임대했다. 1930 년 8 월 4 일 ‘King Kullen Grocery Company’는 세계 최초의 슈퍼마켓에 문을 열었다. 이 매장에는 식료품뿐만 아니라 자동차 액세서리 및 하드웨어를 포함하여 약 1,000 개의 품목을 셀프서비스로 판매했다. 성공은 빨랐고, 사람들은 몇 마일 떨어진 곳에도 방문했다. 그는 많은 고객에게, 편리하고 저렴한 음식을 제공했고, 신문 광고에는 ‘가격 파괴’라고 묘사했다.
그의 체인은 대공황 시절의 가격에 민감한 환경에서 빠르게 확장되었고 버려진 공장과 창고를 포함하여 인구가 많은 지역의 싼 임대 위치에 있는 오래된 건물을 재사용했다. 시설은 간단했고 서비스는 최소화되었다. 자동차를 가진 고객을 타깃으로 대량 구매를 장려하기 위한 충분한 무료 주차 공간이 마련했다. 1936년까지 17개의 King Kullen 슈퍼마켓은 매년 약 6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1936년 52세의 빠른 나이에 쿨렌은 사망했고, 그가 죽은 다음 회사의 성장 속도는 둔화되었다. 하지만 그는 현대 대형 마켓의 속성인 ‘셀프서비스, 별도의 제품 부서, 할인 가격, 마케팅 및 대량 판매’의 개념을 정의하며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을 탄생시켰다.
더 나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선택이 필요하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산업화된 농업과 고밀도 인공 축산업의 발전은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키고 언제든지 우리가 원하는 식품을 먹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이로 인한 생태계의 문제와 환경 문제도 대두되었다. 우리의 미각적 취향이 발달함에 따라 더 많은 환경과 생태계에 문제를 우리가 발생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적 농업 이익 관점에서 볼 때 곡물 수확용 땅을 경작하는 것보다 고기나 우유를 생산하는 것이 더 큰 수익을 가져왔다. 1960년대에 전통적인 축산기술들이 진보를 거듭하여 축산물과 양돈, 양계 생산성에 전문화와 대형화를 시도했다. 대규모 기업의 농업에 대한 투자로 말미암아 농업회사들은 대형화되었다. 초대형 농산물 기업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자본주의 형식의 농업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닌 자본주의식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너무 거대한 기업의 경우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자본주의적 괴물이 스스로 작동하는 시스템에 이끌려 움직이게 된다. 이런 대형 식품회사들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해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길 권리'가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것이 아닌 대부분의 인류도 동참하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농업 생산성의 발전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한 희생으로 생태계의 불균형이 일어나고 빈곤의 양극화도 발생하고 있다. 거대 식품 회사들의 지배적인 위치는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만을 위하여 식물 종자와 동물 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축소시켰고, 거대 식품회사의 효율적이고 통제 가능한 예측 기법은 단일 품종 생산과 고밀도 인공 축산업을 만들어 내고 광우병과 새로운 전염병에 취약한 환경을 만들어 내었다.
미국의 곡물회사인 카길(Cargill)사는 기상 예측과 정보를 위한 민간 위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초거대 기업이며, 역시 미국의 닭고기 및 소고기 유통을 관리하는 타이슨 푸드(Tyson Foods)와 자회사인 소고기 유통회사 IBP(Iowa Beef Processors)는 전 세계의 닭고기와 쇠고기의 육종과 번식에 권한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거대 돼지고기 유통회사였던 스미스필드(smithfield foods)사는 중국인들을 위한 안정적인 돼지고기 공급을 위해 중국 회사가 되어 돼지고기 공급에 최우선 협상 대상이다. 다국적 종자회사인 몬산토(Monsanto)는 GMO(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종자를 생산하고 종자를 독점하기도 한다. 이들 기업들은 인류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고, 위에 열거한 환경과 양극화의 많은 부작용도 낳고 있다. 거대 식품기업들이 등장하면서 글로벌 경제 논리에 생산과 유통을 조직화하고 혁신이라는 기술을 면죄부 삼아 환경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기업이익만을 위해 돌아가는 글로벌한 거대 기업의 생리구조는 휴머니즘을 축소시켜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필수적 요소라고 여겨지는 듯하다.
현대의 지속 가능한 지구 환경을 살리기 위해서 인류 모두가 채식주의자의 길을 선택할 수는 없다. 20세기가 인류가 기아에서 해방된 시기였다면 21세기에는 지속 가능한 선택에 기로에 서있다. 거대 기업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적 구조로 몇몇 기업 CEO와 수뇌부가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인과 정치가, 그리고 가장 힘이 센 우리 ‘소비자’들이 이들을 조정할 수 있다.
외식의 발전과 현대 식탁의 다양성
20세기에 들어서자 식품 생산의 산업화와 더불어 진행된 세계화는 기존의 요리 관습에 대한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 정통 프렌치 레스토랑은 여전히 하나의 표준으로 전 세계를 지배했다. 고급 관광업의 성장과 근대 레스토랑의 폭발적인 증가는 요리의 다양성이 전 세계에 퍼지는 효과를 불러오고, 가정요리에까지 침투되어 부자들만의 전유물이던 레스토랑의 고급 음식들은 평준화되어 서민들의 식탁에도 오르게 되었다.
19 세기말까지 증기선, 철도 및 자동차를 통한 운송의 발전으로 여행에 변화가 생기면서 프랑스의 레스토랑은 영국과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국으로 퍼졌다. 미국에 레스토랑이 상륙하자 식당은 외식과 관련된 모든 포괄적 개념을 합쳐놓은 새로운 구조의 체인 레스토랑인 외식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체인 레스토랑들은 미국의 노동자들의 식사와 외식을 대체하면서 표준화되고, 전문적이고 조직화된 기술로 발전해 나갔다. 체인 레스토랑은 도시의 다운타운과 야구장, 축구장 그리고 컨벤션 센터, 고속도로 휴게소, 학교까지 미국의 모든 장소에 세워졌다. 외식의 다양성으로 인해 여러 국가의 음식들이 체인 레스토랑을 통해 소개되었고, 새로운 미각이 소개되었다. 새로운 체인 레스토랑들은 음식을 맛보기 위한 쾌적한 환경을 제공했고, 위생적이고 안전한 공간에서 영양가 높고 건강한 음식을 제공했다.
핫도그 웨곤에서 핫도그를 사 먹는 아이들(1947년), 과거에는 레드 핫(Red Hot)이라고 불렸다.
농업생산성의 증가와 식품가공기술의 발달로 주식 곡물과 육류, 해산물의 가격이 하락했다. 1890년 독일의 통계학자 에른스트 엥겔은 ‘가계 수입이 높아질수록 식품 소비 비율은 더 낮아진다’는 하나의 사회법칙을 발견했다. 오늘날 서유럽의 식료품비 지출은 총수입 대비 15%로 2차 대전 이전인 엥겔 계수 50%에서 크게 줄어들었다. 고대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하얗고 속은 부드러우며 겉은 바삭한 바게트류는 고급의 식품이었지만, 2차 대전 이후에는 서민들의 일상화된 식탁에 오르게 되었다. 이후 현대 많은 인류는 기아와 배고픔의 고통보다는 비만과 너무 많은 영양 섭취를 고민하는 인류가 되었다.
산업적 식품보존기술의 진화로 식재료를 냉장 냉동 식품군과 신선식품군으로 나뉘었고, 자국에서 생산된 식재료가 아니어도 진공포장법과 급속냉동법등의 방법으로 전 세계에서 수입되었다. 조리법 또한 조리 기구와 기기의 발달, 즉 모든 가정용 및 산업용 기구들 가스레인지와 전기레인지, 마이크로웨이브 기술을 접목시킨 전자레인지, 푸드 믹서와 식품가공기술을 통한 전 처리된 식재료들이 가정에 침투되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현대 식재료들은 콜드체인 시스템 안에서 냉장 냉동되어 진공포장 혹은 밀폐 포장되어 적정한 분량으로 재단되어 알맞은 인원수대로 유통된다.
그리고 현대의 음식에 관한 관점은 양분화되어 가정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가정식과 간편식, 그리고 미식적인 측면에서 최고급 레스토랑들은 명품 사치 산업에 편입되고 운영되어, 유명 셰프들은 대중들의 샐럽으로 존재하고 있다.
20세기, 새롭고 다양한 조리 기기의 발전을 이루다
초기 전자레인지는 높이 1.8m에 무게는 340kg의 주방전용기기로 설계되어 주방 냉장고와 나란히 설치할 수 있도록 벽면 유닛 설치 형태로 개발되었다.
전자레인지(마이크로 웨이브)
물질을 가열하기 위한 고주파 무선파의 이용은 1920년경 개발되고, 1930년대에는 의학적 치료법으로 발전했다. 근대 의학 기술은 완성되지 못한 기술들의 적용으로 전기 충격과 전자파를 환자에게 투여함으로써 치료 효과가 나타나기를 바랐다. 진정한 조리 기술을 위한 전자레인지 기술의 등장은 1933년 시카고 세계 박람회로 웨스팅 하우스사가 10kW, 60 MHz 단파 송신기에 부착된 두 개의 금속판 사이에서 음식 조리를 시연했다. 1945년, 미국 공학 엔지니어인 퍼시 스펜서(Percy Spencer)가 고전력 마이크로파 빔의 ‘가열 효과’를 발견하면서 전자레인지의 특허를 출원하고, 1947년 최초의 상용 전자레인지인 라다 레인지(Radarange)를 제작 판매했다. 높이 1.8m에 무게는 340kg의 주방전용기기로 설계되어 주방 냉장고와 나란히 설치할 수 있도록 벽면 유닛 설치 형태로 개발되었다.
스펜서의 라다 레인지로 요리할 수 있는 첫 번째 음식은 팝콘이었다. 음식을 마이크로파 에너지로 상자에 넣었을 때 음식의 온도가 빠르게 상승하기는 했지만 조리용으로는 적합하지 않고, 음식을 다시 데우기에는 적합했다. 초기의 크고 무거운 라다 레인지의 가격은 1947년 당시 미화로 5000달러로 팝콘과 음식을 다시 데우는 용도로 사용하는 기계로는 상당히 비싼 가격이었으며, 전기도 상당히 소비를 많이 했다. 이후 1955년 1300달러대로 가격이 떨어지기는 했지만 크고 무거우며 가격이 비싼 ‘팝콘 기계’는 소비자에게 외면을 받았다.
일본의 전자 기술이 발전하면서 일본 샤프(Sharp)사는 1961년에 새로운 전자레인지를 제조하기 시작했다. 1964년에 샤프는 턴테이블을 갖춘 최초의 소형 가종용 전자레인지를 출시하고 미국에 수출하기 시작했다. 1970년 미국의 산업용 전자레인지는 4만 대였으나 1975년에는 100만대로 증가했고, 당시 전자레인지 시장은 7억 5천만 달러로 추정되었다.
1970년대 후반, 기술 발전으로 샤프는 저렴한 가정용 전자레인지를 제조하여 1980년대 전자레인지 시장의 급속한 확장을 이끌었다. 1980년대에 샤프와 같은 일본 회사들이 지배한 전자레인지는 1980년대 후반 한국 제조업체들 이 시장에 진출하기 시작했으며 삼성은 주요 전자레인지 제조업체가 되었다. 이전에는 대규모 산업 응용 분야에서만 발견된 전자레인지는 점차 선진국의 가정 주방의 필수 가전이 되었다. 1971년의 선진국 가정 1%에서 전자레인지를 소유했지만, 1986년까지 선진국 가정의 약 25%가 소유했고, 현재는 선진국 가정의 98%가 전자레인지를 소유하며 83% 인구가 전자레인지를 매일 사용한다고 한다.
믹서(블랜더)
스테판 폽로스키(Stephen J. Poplawski)와 그의 초기 믹서 모델
스티븐 일렉트릭사의 소유주 인 스테판 폽로스키(Stephen J. Poplawski)는 1919년에 아놀드 전기와 계약을 맺고 맥아 밀크 셰이크를 만들기 쉽도록 믹서를 설계하기 시작했다. 1922년에 음료수 믹서를 특허를 받았으며, 1930년대에 해밀턴 비치(Hamilton Beach Company)사는 폽로스키의 새로운 발명품인 밀크셰이크용 믹서를 제작했다. 해밀턴 비치 사는 밀크 셰이크용 믹서를 개선하여 여러 종류의 믹서기를 만들어 믹서기를 가정에 보급했다.
1937년에 스무디를 대중화한 웨어링 블렌더(warning Blendor)가 출시된다. 웨어링 블렌더는 잘 깨지지 않는 견고한 유리용기로 유명한 파이렉스(Pyrex) 유리 용기를 믹서 교반기 부분으로 제작하여 믹서를 대표하는 대명사가 되었다. 1937년에 바이타 믹스(Vitamix)사는 warning에서 사용하는 유리 재질의 파이렉스 대신 기능적으로 스테인리스 용기가 있는 강화 믹서기‘더 블렌더(The Blender)’라는 제품을 출시하면서 이때부터는 믹서는 ‘블렌더’로 불리게 된다.
1946년 또 하나의 유명한 블렌더 제조 회사인 오스터(Oster) 사가 오스터라이저(Osterizer)라는 상표로 상용화한 자체 믹서기를 개발했다.
1949년 바이타 믹스 사는 최초의 믹서기를 텔레비전에서 광고했다. 빵가루, 팬케이크 반죽, 과일음료 및 디저트 음료를 만드는 데 블렌더를 사용하면 편리하다고 광고했다.
스무디와 셰이크, 음료수 제조 및 음식 준비를 위한 블렌더가 인기를 끌면서 블렌더는 주방에서 필수적인 주방 보조기구로 존재하고 있다.
무쇠 냄비의 보급과 튀김요리의 증가
‘더치 오븐’(뚜껑이 단단히 고정된 무쇠냄비)과 튀김용 기름이 흔해지자 감자튀김이 유럽에서 유행되었다.
세계의 식문화에는 튀김과 관련하여 자체 역사가 있지만 ‘튀김’이라는 용어는 19세기 이전까지는 흔하지 않았다. 일본은 에도시대인 1600년대에 밀가루 반죽에 묻혀 튀긴 채소와 해산물로 구성된 가장 오래된 튀김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서양에서는 1800년대 후반 산업혁명으로 제철의 공급량이 확장되면서, 무쇠(주철) 조리기구가 널리 보급되었다. 내구성이 뛰어나고 보온성이 뛰어난 소재인 무쇠는 조리 기구로써의 무쇠냄비와 무쇠 프라이팬을 만들었고 ‘더치 오븐’(뚜껑이 단단히 고정된 무쇠냄비)을 만들어 냈다. 또한 식물성 유지에 수소결합 기술로 인한 튀김용 기름이 흔해지자 튀김이라는 조리기술이 유럽에서 유행되었다.
각 가정에도 보급되는 무쇠 솥과 저렴한 튀김용 유지, 유럽의 주식 감자의 만남은 유럽에서 빵 다음으로 많이 소비되는 가장 유명한 음식인 ‘프렌치프라이(감자튀김)’을 탄생시켰다. 가장 단순하고 대표적인 패스트푸드라고 생각하는 감자튀김은 사실 가장 현대적인 요리 접근 방식인 튀김으로 19세기 후반에 들어서야 만들 수 있었다.
세계적으로 튀김 조리법은 인기를 얻으며 세계각지역의 많은 튀김음식을 탄생시켰고, 특히 미국 남부의 프라이드치킨과 영국의 피시 앤드 칩스등으로 발전했다.
18세기 후반에 발명된 감자튀김이 유럽에서 대인기를 끌면서, 1860년 죠셉 마린(Joseph Malin)은 런던 최초의 ‘피시 앤 칩스’ 레스토랑을 열었다. 튀김은 19세기에 미국으로 건너와 미국 남부에서 무쇠솥의 인기와 더불어 현대에도 볼 수있는 튀김 요리가 많이 개발되었다. 19세기 중반에 도넛이 발명되었으며, 양파링, 프라이드치킨, 콘도그와 같은 음식은 모두 20세기 초에 발명되었다. 그리고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의 성장으로 튀긴 음식, 특히 감자튀김의 범위가 확대되고 있다.
사일런트 커터
The meat chopping machine, seydelmann, 1886
19세기 중반부터 독일인 이민자들이 미국에 유입되면서 미국의 요리 관습에 독일 음식도 착색되었다. 그중 대표적인 음식이 소시지였다.
도살된 가축의 남은 고기와 육류 부산물을 장에 채워 조리한 소시지의 역사는 이집트 시대에 벽화로도 남아 있기도 하며, 고대 중국부터 로마시대까지 인류에게 오래된 음식의 역사로 전해 내려온다. 독일은 소시지에 있어서 소시지 순결법(bratwurst purity law, 1432년)을 정할 정도로 소시지 생산 관리에 관하여 엄격한 법률을 제정한 소시지를 사랑하는 나라이다.
독일 소시지가 세계화된 것은 독일 이민자들의 소시지가 미국에 퍼진 이유도 한 몫하겠지만, 독일의 세계 최초의 육가공 기계 생산 회사인 세이델만(Seydellmann)의 역할도 중요했다. 독일의 알렌 지방에서 안드레아 세이델만이 창립한 회사인 세이델만은 농업기계를 만드는 회사로 출발한다.
이후, 안드레아의 아들 루이스 세 에델만은 세계 최초의 meat chopping machine(고기 분쇄기)를 발명하고, 육가공 기기 제작 사업을 시작한다. 기계공학자 출신인 루이스 세이델만의 지휘 아래 세이델만 사의 육가공 기계들은 발전을 거듭하여 1910년 세계최초로 분당 800회전을 할 수 있는 소시지 '유화 작용(emulsification)'이 가능한 소시지를 생산할 수 있는 육가공기계 '보울 커터(Bowl Cutter)'를 개발했다.
물과 기름이 섞이는 현상을 식품업계에서는 유화 작용(emulsification)이라 하는데, 유화가 잘 되기 위해서는 물과 지방 단백질을 완벽하고 빠르게 섞어줄 수 있는 기계가 필요했다. 소시지 보울 커터(Bowl cutter)는 당시에는 혁신적인 기기로 단백질과 지방, 물을 빠른 속도로 섞어 고운 반죽으로 유화시켜 현대적인의 '유화형 소시지'를 생산하게 했다.
세이델만은 정육점을 중심으로 한 가내 수공업식의 소시지 산업을 현대 육류 가공의 기계화된 공장형 소시지 업체로 탈바꿈시키는 데 성공한다.
그리고, 1893년 시카고에서 열린 콜롬비언 박람회에서 '핫 도그(Hot Dog)'가 데뷔를 하면서 소시지는 더욱더 미국 음식의 중심에 편입되어 미국의 대형 마트 체인의 역사와 함께 소용돌이치며 진입한다. 1950년대 미국에서는 각 지역의 슈퍼마켓과 정육점에서 팔리던 소시지들이 대형 마트 체인의 발전과 함께 대형 마트에 필요한 소시지를 공급할 전국적인 유통망을 지닌 거대 소시지 회사를 필요로 하게 되었다.
육가공 기계와 기구의 발전과 식품첨가물의 발달, 대형 마트라는 거대 유통망의 탄생은 소시지의 초 대량 생산이라는 임무를 부여했다. 독일 이민자들의 음식이었던 소시지는 공장 생산화된 엄청난 생산력과 함께 아시아와 남미, 아프리카까지 전 세계에 가장 유명한 육가공 식품으로 알려지기 시작한다.
2018년 현재 세계 최대의 소시지 회사는 미국의 소시지가 탄생한 위스콘신주에 위치한 존슨빌 소시지(Johnsonville sausage)로 세계 최대의 소시지 회사답게 매일 3400마리의 돼지를 도살하고 생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었다.
식사 공장, 외식 프랜차이즈의 발명
20세기 초반 레스토랑 산업이 커지면서 주방은 노동 집약형 생산시설로 변해갔다. 직업적인 셰프는 물론이고 가정주부들도 새로운 요리 체계에 순응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시의 새로운 중산층을 형성한 사무직과 도시 노동자들이 레스토랑에 바라는 것은 속도와 청결이었다. 그에 따라 전통적인 레스토랑의 구성요소들도 변화하기 시작했다.
미국의 레스토랑은 웨이터가 식사를 전달하고 식사를 마치면 계산서를 들고 오는 형태의 전통적인 레스토랑 서비스를 셀프서비스와 계산대에서 돈을 내는 형식의 셀프서비스로 변화했다.
프랜차이즈는 1900년대 중반에 새로운 유형의 프랜차이즈가 소매 및 패스트푸드 체인의 형태로 등장했을 때 더욱 유행을 거두었다. 당시의 교외로의 이동과 베이비 붐의 출현으로 도시 외곽의 더 먼 지역에서 패스트푸드 및 소매 체인이 개발되어야 하므로 이러한 유형의 비즈니스를 프랜차이즈 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프랜차이징 모델은 고객에게 균일한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여 성공적인 비즈니스 운영을 위한 공식을 제공하기 때문에 효과적이었다. 프랜차이즈 본사에게 필요한 자본을 제공하고, 유통 채널을 만들고, 소비자에게 기대할 수 있는 표준과 더 높은 인식 가치를 제공했다. 비즈니스 소유자, 운영자 및 고객 모두에게 이익이 되는 모델이었다.
안전하고 현대적이며 살균된 백색의 성(White Castle)이라는 환경에서 음식을 준비했음을 고객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미국에서 두 조각의 빵 사이에 제공되는 고기 패티로 합쳐진 현대 햄버거가 탄생했다. 위스콘신주의 시모어(Seymour)와 오하이오주의 애크런(Akron)을 포함하여 미국 햄버거의 출생지라고 주장하는 주가 여러 곳 있다. 가장 오래된 햄버거 가게는 화이트 캐슬(White Castle) 햄버거로 1921년 설립하여 미국 최초의 패스트푸드 버거 체인을 만들었다. 세균의 발견, 건강과 위생의 연관성으로 인해 청결에 대한 강조 되면서 20세기 초 화이트 캐슬 레스토랑은 흰색 인테리어를 적용했다. 안전하고 현대적이며 살균된 백색의 성(White Castle)이라는 환경에서 음식을 준비했음을 고객에게 확신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이러한 청결함과 위생적인 인테리어의 표준은 계속 이어져 현대의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으로도 이어졌다. 청결함과 표준화된 서비스를 갖춘 화이트 캐슬 버거는 성공했을 뿐만 아니라 햄버거도 대중화에도 기여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고전적인 패스트푸드 햄버거는 대부분 맥도널드의 CEO인 레이 크록(Ray Kroc)에 기인한다. 맥도널드는 햄버거의 대명사이기도 하고 외식 프랜차이즈의 시작이기도 하다. 사실 당시까지만 해도 미식의 변방 미국에서 간 고기를 구워 빵에 쌓아먹는 수많은 샌드위치의 하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레이 크록은 햄버거를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노동 집약적이고 생산이 쉽고, 저렴한 햄버거를 미국인들이 먹는 방식으로 바꾸어 외식 프랜차이즈 업계에 혁명을 일으키고 전 세계에 미국식 햄버거를 수출했다.
일리노이 주 시카고에서 태어난 레이 크록은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1 차세계 대전에서 댄스 밴드 음악가, 세일즈맨, Lily-Tulip 종이컵 및 접시 대표, 그리고 나중에 그의 구급차 운전사였다. 그 후, 밀크셰이크 혼합기의 판매원 일을 하게 된다.
1954년, 크록은 맥도널드 형제의 캘리포니아 샌 버나디노의 작은 햄버거 가게를 방문했는데, 그가 발견한 것은 저렴한 가격에 고품질 샌드위치를 생산하는 전문 노동 시스템이었다. 헨리 포드 자동차 공장의 조립 라인 개념에서 힌트를 얻은 McDonald 형제는 숙련도가 낮은 직원을 고용하여 가장 빠르고 저렴한 음식을 제공하기 시작했다. 맥도널드 형제는 햄버거를 '요리'하는 주방이 아닌 '조립'하는 주방으로 변형시켰다. 형제들은 음식을 효율적이고 저렴하게 제공하는 데 성공했지만 프랜차이즈에는 능숙하지 않았다. 레이 크록은 McDonald의 콘셉트에서 1954년에 형제들의 잠재력을 보았고, 이를 프랜차이즈화 하고, 이 새로운 공식은 패스트푸드 체인의 선례가 되어 미국 식당의 풍경을 바꾸었다.
맥도널드가 창업한 그해, 1956년 미국의 '연방지원 고속도로 법'이 제정되고, 6600km의 고속도로가 건설되고 고속도로 근교 상업지구와 주택 건설붐이 일어났다. 레이 크록은 헬리콥터를 타고 다니며 미국의 고속도로의 인터체인지마다 맥도널드 매장을 오픈하였다.
새로운 인터체인지가 생기는 곳에 마을이 형성되고 새로운 도시에는 청교도의 나라답게 미국의 개신교 교회가 들어섰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중심으로 모이게 되면서 만남의 장소도 요구되었다. 매장 근처의 교회에서 예배를 마치고 나와, 맥도널드 햄버거는 모임의 장소가 되면서 맥도널드의 황금 아치는 ‘천국의 문’으로 불리기도 했다. 신도시가 세워지면 교회와 맥도널드는 자연스럽게 한 세트로 세팅이 되어가면서 햄버거와 맥도널드는 미국 식문화의 주류로 떠오른다.
레이 크록은 일명 'turn-key system' (일괄수주계약 : 맥도널드 매장을 표준화하여 교육된 매니저가 Key가 되어 열쇠만 돌리면 매장을 가동할 수 있는 상태로 인도하는, 자동차의 개념으로 설계하고 판매하는 시스템)를 도입하고 지점을 미국 전역에 확산시켜 맥도널드의 파운더(설립자)가 된다. 레이 크록은 맥도널드를 '햄버거를 파는 매장'이 아닌 '맥도널드 지점을 파는 부동산업'의 주식회사로 탈바꿈시켰다. 레이 크록은 프랜차이즈 지점을 짓기 위해 토지를 구입 한 다음 장기임대로 프랜차이즈에게 부동산을 임대했다. 이후, 레이 크록은 자동차를 팔듯이 맥도널드 매장을 판매하기 시작하고, 햄버거를 파는 것이 아닌 햄버거 생산수단을 판매하는 프랜차이즈 기업으로서의 맥도널드로 성장시킨다. 조지 리처는 ‘맥도널드 그리고 맥도널드화’에서 맥도널드식 프랜차이즈화의 4대 요소인 효율성과 계산 가능성, 예측가능성 그리고 통제로 규정했다. 이런 4가지 요소들은 외식 프랜차이즈의 표준이 되고, 새로운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들이 탄생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KFC, 도미노 피자, 크리스피 크림 도넛 등 모든 외식 프랜차이즈들은 맥도널드식 기법을 모방하게 되고, 식문화의 변방이자 외식문화의 후발주자였던 미국을 단번에 세계 최고의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 수출국으로 변모시킨다.
2018년 집계로 맥도널드 햄버거의 판매량은 650억 개의 햄버거를 판매한 것으로 추정했다. 맥도널드는 미국 전체 감자 작물 생산량의 7.5 %를 구매한 것으로 추정되며 식품업계의 큰손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핫박스를 만들어 배달의 혁명을 일으킨 도미노 피자
피자 도우 위에 토마토소스가 토핑 된 현대적인 피자의 역사는 콜럼버스가 토마토를 유럽에 소개하고 유럽인들이 토마토가 관상용 식물이 아닌 농작물로 작물 화된 시기인 18세기부터이다. 이태리 나폴리에서 피자는 주방이 아닌 길거리에서 만들어져 팔리기 시작하는데 이것이 우리가 아는 피자의 시작으로 거리의 노점상도 발전하여 건물에 점포를 얻어 Pizzeria(피제리아)로 발전한다. 1889년 이탈리아의 여왕 마르게리타가 나폴리를 방문할 때 그녀의 이탈리아 통일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나폴리의 피자 장인 라파엘 에스포지토가 이탈리아 국기색인 레드, 화이트, 그린(토마토, 모짜렐라 치즈, 바질)으로 장식된 피자 인 "피자 마르게리타 (Pizza Margherita)"를 만들었다. 이탈리아 남부의 음식이었던 피자는 19세기 후반부터 수많은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의 농민들이 대거 미국 이민자로 유입과 미국 안에서 이탈리안 커뮤니티가 발전하면서 미국에 뿌리내리기 시작한다.
1960년 최초의 도미노 피자는 폭스바겐 비틀 차량으로 완성된 피자를 배달하는 형식으로 시작했다.
프랜차이즈가 발달하면서 피자 역시 프랜차이즈화 되기 시작한다. 특히 도미노 피자(Domino pizza)는 외식메뉴에서 매장이 필요치 않은 Pizza Delivery system(피자 배달 시스템)으로 발전시킨다. 1960년 최초의 도미노 피자는 폭스바겐 비틀 차량으로 완성된 피자를 배달하는 형식으로 시작했다.
도미노 피자의 로고에 세 개의 점은 이때 시작되었다고 하는데, 처음에 3개의 지점을 뜻하던 로고 안의 점은 지점이 늘어날 때마다 하나씩 점을 늘리자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했다. 이처럼 소박한 포부에서 시작한 지점 수는 가히 폭발적으로 늘어나 로고의 점으로 점포의 수를 표현하고자 했던 아이디어는 취소되었다. 현재 도미노 피자의 총 매장 수는 1만 6천 개로 빨간 박스 안에 점이 만 육천 개가 있다고 상상해 보면, 점 세 개인 도미노 피자 로고가 좋은 결정임을 부인할 수 없다.
'핫 박스'와 '30분 보증제'로 대표되는 도미노 피자는 새로운 피자 딜리버리 시스템으로 승승장구했다. 배달 전화부터 POS system(Point of sales System, 판매시점 정보관리) 도입하여 초단위로 주문과 생산시간을 줄이고 핫 박스를 도입함으로써 식지 않는 따끈한 피자를 배달했다. 피자 상자가 처져서 피자치즈가 상자 윗면에 눌어붙는 걸 방지하는 삼각대를 피자 가운데에 설치하는 아이디어, 30분 이내에 배달이 완료되지 않을 경우 피자를 무료로 제공하는 등 지금 생각해도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아이디어들을 피자에 이식했다.
1970년대에 이르러 외식 프랜차이즈 시장은 포화에 이르렀다. 많은 프랜차이즈 가맹 본부들은 성공적인 외식 프랜차이즈 시스템을 지원하고 운영하는 것보다 가맹점 판매에만 더 중점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미 레드오션화 된 프랜차이즈 시장에 외식에 대한 철학과 새로운 기술이 없는 돈벌이 만을 위한 외식 프랜차이즈들의 도전은 쉽지 않았다. 몇몇의 외식 프랜차이즈 브랜드는 파산했고 수많은 프랜차이즈 가맹점들이 폐점하면서, 프랜차이즈 시스템은 나쁜 평판을 얻었다. 이러한 관행의 결과로 프랜차이즈에 대한 투자는 투기 투자로 간주되었다. 현대 프랜차이즈 법률이 개발되었고 연방법 및 주법 모두 프랜차이즈에 관한 규정이 공포되었다. 2018년 미국의 노동 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에 따르면 미국인 가정은 1년에 3,154 달러를 외식에 소비하는데, 한 달에 258달러로 아직도 미국 식당 업계가 계속 영업이 잘되고 있는 이유이다.
냉동식품과 콜드 체인 시스템의 탄생
Clarence Frank Birdseye 1886~1956
클라렌스 버즈 아이는 미국의 발명가이자 기업가로 현대 냉동식품 산업의 창시자로 여겨진다. 미국 농업부에서 근무하던 그는 캐나다 북동부의 레브라도(Labrador) 지역에서 동물 조사 프로젝트 일을 하고 있었다. 북극과 가까운 추운 지역의 레브라도에는 많은 이누이트 원주민들이 거주하고 있었고, 어느 날 버즈 아이는 원주민들로부터 물고기를 급속하게 얼리는 법을 배웠다. 이때 그는 캐나다 북동부 레브라도의 추운 날씨인 영하 40°C의 날씨에서 잡은 물고기가 급속 냉동되고 나서 해동될 때 신선한 맛을 낸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는 미국의 뉴욕에서 판매되는 냉동 해산물이 래브라도의 냉동 생선보다 품질이 낮다는 것을 이로써 즉시 인식했다. 그는 급속냉동 법이 식품의 보존과 품질에 매우 유익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존의 시간 동결 방법은 일반적으로 고온에서 수행되었으므로 동결이 훨씬 느리게 발생하여 얼음 결정이 자라는 시간이 길어졌다. 급속 동결은 더 작은 얼음 결정을 생성하여 조직 구조에 대한 손상을 덜 발생시켰다.
1922년 버즈 아이는 자신의 회사인 Birdseye Seafoods Inc. 를 설립하여 영하 43°C에서 냉장 생선 필렛(생선살)을 냉동했다. 하지만 1924년에 그의 회사는 냉동제품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 부족으로 파산했다. 같은 해에 그는 냉동식품에 대한 기술을 포기하지 않고 상업적으로 가능한 빠른 냉동을 위한 완전히 새로운 프로세스인 압력 동결법을 개발하고 1925년 General Seafood Corporation을 세웠다. 그의 발명은 오늘날 냉동식품 산업의 시작이었고, 1927년에는 육류, 가금류, 과일 및 채소를 급속 냉동하는 과정을 확장했다.
1929년, Birdseye는 회사와 특허를 2,200만 달러에 골드만 삭스에 매각했다. Birdseye는 회사와 계속 협력하여 냉동식품 기술을 더욱 발전시켰다. 냉동 육류와 시금치, 완두콩, 다양한 과일과 굴 등을 포함하여 26 개의 품목을 새로운 냉동기술로 냉동식품산업을 개척했다. 냉동식품 덕분에 많은 식품들을 다른 대륙까지 운송할 수 있게 되었고, 지구 반대편에서 수확된 신선한 음식을 저렴한 가격으로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소비자들은 버즈 아이의 새로운 냉동제품을 좋아했으며 오늘날 이것은 냉동식품의 탄생으로 간주된다.
프레데릭 존스(Frederick McKinley Jones)는 냉장장치를 개발하고 장착해 최초의 냉장 트럭을 발명하고, 특허를 취득했다.
미네소타 교통 회사의 해리 워너는 1938년 5월 목요일 뜨거운 햇살 아래 친구들과 골프를 즐겼다. 그러나 그가 클럽 하우스로 돌아왔을 때 워너의 좋은 분위기는 한통의 전화로 즉시 망가졌다. 미네소타 트럭 중 하나가 시카고로 가는 도중에 고장 났고, 오늘날 1억 원 정도에 해당하는 생닭이 트럭에서 부패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의 닭고기를 포함한 육류는 도축장에서 냉장창고까지 즉, 공급자와 소비자의 운송거리 과정을 컨테이너에 얼음으로 차갑게 온도가 유지되어 운송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얼음이 햇볕에 녹으면서 트럭의 온도가 상승하여 당시의 신선 식품들을 운반하던 컨테이너는 부패 사고가 흔히 발생했다. 캘리포니아에서 뉴욕시로 향하는 멜론으로 가득 찬 철도 차량은 5톤의 얼음으로 포장되어 11일 동안 여러 번 4톤의 얼음을 보충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음 보충 시기를 놓쳐서 멜론이 모두 부패하고 뉴욕시에서 멜론의 가격이 폭등하기도 했다.
해리 워너는 냉장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사업이 망할 것 같다며 불평 섞인 농담을 건넸고, 그날 골프를 치던 친구인 조 누메로는 해리 워너에게 트럭에 냉장고를 달아야 한다고 농담으로 말했다. 그러나 해리 워너는 알루미늄 트럭을 구입하여 조 누메로에게 가져왔다.
조 누메로는 영화 음향 관련 엔지니어링 회사를 운영하고 있었고, 프레데릭 존스(Frederick McKinley Jones)라는 엔지니어와 파트너십을 맺고 있었다. 조 누메로 역시 장거리 운송을 처리할 수 있는 견고한 냉장 시스템을 만들 수 있다면 큰돈을 벌 수 있다고 생각했고 프레데릭 존스에게 찾아가 문제를 상의했다. 조 누메로는 냉장 탑차를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지만 프레데릭 존스는 트럭에 들어가서 몇 가지 측정을 수행한 후 냉장 장치를 개발할 수 있다고 결론을 내렸다.
프레데릭 존스는 몇 주 후, 장거리 운행의 충격을 견딜 수 있는 냉장장치를 개발하고 장착해 최초의 냉장 트럭을 발명하고, 특허를 취득했다. 연료로 구동되는 엔진으로부터 에너지를 얻어 이동식 냉동 압축기를 가동하고 이를 통해 신선식품은 생산 지점에서 소비자에게까지 차갑게 유지되었다. 조 누메로와 프레데릭 존스와 파트너십을 맺고, 기존의 음향 관련 엔지니어링 회사를 매각하고 새로운 회사인 ‘US Thermo Control Company’를 창립했다. 이 획기적인 발명품은 냉동식품, 대형 슈퍼마켓 및 현대식 레스토랑 산업의 시대를 열었다. 1940년대에 최초의 냉장 박스카는 운송비용을 절감하여 신선한 농산물을 대중에게 보다 널리 보급하고 저렴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냉장 운송으로 계절에 관계없이 전국 어디서나 신선한 농산물을 배달할 수 있었다. 당시 냉장 트럭과 냉장 기차는 ‘농장에서 포크로’라는 구호와 함께 콜드 체인(냉장 운송)의 개념을 만들었다. 그들의 회사는 1949년까지 연간 매출은 300 만 달러에 달했다.
프레데릭 존스는 냉장 차량에 대한 연구를 거듭하여 1943년 Model-C 냉장고 트럭의 특허를 받았고, 이 모델-C 차량은 냉장 차량으로 인기를 얻으며 2차 세계 대전에서 의료 장비와 혈액을 운송하는 데에도 사용되어 수많은 생명을 구하기도 했다.
‘US Thermo Control Company’는 후에 ‘Thermo King Corporation’의 전신으로 현대에도 냉장 냉동 운송산업에서 친숙한 이름이자 여러 기여를 한 기업으로 남아있다.
Thermo King은 냉장 제품 운송에만 국한되지 않았는데, 이 회사가 발명한 또 하나의 제품은 쇼핑 카트로 당신이 구매한 냉장식품을 차량 트렁크에 넣기 쉽도록 운반해준다.
대형 슈퍼마켓의 출현
식품의 새로운 포장 기술인 콜드 체인은 식품의 저장을 연장하고 장거리 운송을 가능케 하는 식품 산업의 핵심 구성 요소이다. 그리고 새로운 식품가공 기술들은 음식을 완성품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식재료를 세분화하고, 각 부위별 포장과 무게를 표준화했다. 새로운 식품 포장 기술은 허들 기술(Hurdle Technology)을 탄생시켜 신선식품의 보존성을 과거에 생각지도 못하는 기간만큼 연장시켰다. 허들 기술이란 품질 변화에 영향을 미치는 미생물들이 극복할 수 없는 장애 조건(식품 보존료, 설탕을 이용한 당장, 소금을 이용한 염장, 탈수, 식초를 이용한 고산도, 고농도 보존료, 극단적 열처리, 냉동처리)을 여러 번 제공하여 식품의 저장성을 향상하는 방법이다.
이러한 전처리 식품들은 결과적으로 음식을 준비하는 작업을 제거함으로써, 식품 피라미드의 최종 단계에 요리사나 소비자들이 서게 된다. 식품 피라미드의 최종단계에 서게 됨으로써 요리는 재료를 씻어서, 가열하고 차려내기만 하는 과정으로 단축되었다.
음식을 먹기 위해 과거의 시간보다는 하루 식사를 준비하기 위한 많은 시간이 단축되었고, 최종 단계인 직접 먹는 행위만을 영위하면서 요리에 필요한 여러가지 중간 과정이 생략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제 식품을 얻기 위해 소비자들은 들판을 나가거나 사냥터나 목장을 가는 것이 아니라 절대적으로 대자본으로 운영되는 대형 식품회사의 육류와 곡류, 대기업의 유통망 속에 거미줄처럼 이어진 슈퍼마켓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Astor_Market_demonstrating_coffee_in_Manhattan_in_1915
대규모 경제에 의해 작동되는 대형 식품 마켓의 개념은 빈센트 아스터(Vincent Astor)에 의해 개발되었는데 현대 슈퍼마켓의 전신인 뉴욕의 아스터 마켓(Astor Market)으로 1915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고급 백화점의 음식 판매 전략으로 초기에는 고객이 카운터 앞에서 원하는 식품을 이야기하면 카운터 뒤 선반에서 판매자가 제품을 가져왔다. 대부분의 음식과 상품은 개별적으로 소비자가 원하는 무게와 크기로 정확한 양을 측정하고 포장해야 했다. 물건을 살 수 있는 고객의 수는 상점에 고용된 직원 수만큼 제한되었다. 이러한 관행은 본질적으로 느리고 노동 집약적이어서 상당히 비쌌다. 아스터 마켓은 고기와 과일, 농산물 및 꽃을 판매하는 쇼핑몰로 원거리 고객도 수용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지만 당시의 교통수단으로는 원거리 고객을 유치하는 것은 어려웠으며, 결국 1917년에 아스터 마켓은 문을 닫았다.
Kings Checkout Worker의 1960 사진
셀프서비스 식료품점의 개념은 기업가 클라렌스 사운더(Clarence Saunders)가 피글리 위글리(Piggly Wiggly) 마켓에서 1916년에 처음 이루어졌다. 클라렌스는 자신의 매장에 셀프서비스 아이디어에 대해 다수의 특허를 받았다. 클라렌스의 셀프서비스 마켓은 성공했으며 프랜차이즈화 하여 지점을 만들었고 이후, 크로거(Kroger)와 세이프웨이(Safeway)등의 대형 셀프서비스 마켓이 등장했다.
미국 최초의 슈퍼마켓이 1930년 뉴욕의 퀸즈 자메이카에 있는 6,000평방 피트(180평 정도)의 차고를 개조하여 마이클 제이 컬렌(Michael J. Cullen, 1884–1936)에 의해 개설되었다. 마이클 제이 컬렌은 ‘King Kullen’ 체인의 창업자로 미국에서 최초로 설립된 현대 슈퍼마켓의 발명가로 인정받고 있다.
컬렌은 1919년에 당시의 식료품 판매 체인점인 크로거(Kroger)에 입사하여 1930년까지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슈퍼마켓이라는 아이디어를 개발했다. 그는 Kroger 회장에게 편지를 써서 저렴한 가격, 더 큰 쇼핑 공간, 현금 판매, 제한적 배달 서비스 및 주차장이 많은 임대료가 적은 지역에 초점을 맞춘 지점 등 현대의 대형 마켓과 같은 새로운 유형의 식품점을 제안했다. 컬렌은 제안서에서 새로운 유형의 매장이 크로거의 매장의 수익의 10배를 달성할 수 있다고 제안했지만 컬렌의 편지는 답을 얻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아이디어가 현실이 되는 것을 확신하고 크로거를 그만두고 미국 동부 뉴욕의 롱아일랜드 지역에서 자신의 매장을 시작했다. 컬렌은 번화한 쇼핑가에서 몇 블록 떨어진 퀸즈(Queens)의 모퉁이에 빈 차고를 임대했다. 1930 년 8 월 4 일 ‘King Kullen Grocery Company’는 세계 최초의 슈퍼마켓에 문을 열었다. 이 매장에는 식료품뿐만 아니라 자동차 액세서리 및 하드웨어를 포함하여 약 1,000 개의 품목을 셀프서비스로 판매했다. 성공은 빨랐고, 사람들은 몇 마일 떨어진 곳에도 방문했다. 그는 많은 고객에게, 편리하고 저렴한 음식을 제공했고, 신문 광고에는 ‘가격 파괴’라고 묘사했다.
그의 체인은 대공황 시절의 가격에 민감한 환경에서 빠르게 확장되었고 버려진 공장과 창고를 포함하여 인구가 많은 지역의 싼 임대 위치에 있는 오래된 건물을 재사용했다. 시설은 간단했고 서비스는 최소화되었다. 자동차를 가진 고객을 타깃으로 대량 구매를 장려하기 위한 충분한 무료 주차 공간이 마련했다. 1936년까지 17개의 King Kullen 슈퍼마켓은 매년 약 600만 달러의 매출을 올렸다. 그러나 1936년 52세의 빠른 나이에 쿨렌은 사망했고, 그가 죽은 다음 회사의 성장 속도는 둔화되었다. 하지만 그는 현대 대형 마켓의 속성인 ‘셀프서비스, 별도의 제품 부서, 할인 가격, 마케팅 및 대량 판매’의 개념을 정의하며 오늘날 우리가 이용하는 대형 슈퍼마켓 체인을 탄생시켰다.
더 나은 음식을 먹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선택이 필요하다.
20세기 후반에 들어서자 산업화된 농업과 고밀도 인공 축산업의 발전은 인류를 기아에서 해방시키고 언제든지 우리가 원하는 식품을 먹을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이로 인한 생태계의 문제와 환경 문제도 대두되었다. 우리의 미각적 취향이 발달함에 따라 더 많은 환경과 생태계에 문제를 우리가 발생시키고 있는지도 모른다.
자본주의적 농업 이익 관점에서 볼 때 곡물 수확용 땅을 경작하는 것보다 고기나 우유를 생산하는 것이 더 큰 수익을 가져왔다. 1960년대에 전통적인 축산기술들이 진보를 거듭하여 축산물과 양돈, 양계 생산성에 전문화와 대형화를 시도했다. 대규모 기업의 농업에 대한 투자로 말미암아 농업회사들은 대형화되었다. 초대형 농산물 기업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자본주의 형식의 농업은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이 아닌 자본주의식의 이익에만 초점을 맞추게 된다. 너무 거대한 기업의 경우는 인간의 통제를 벗어나 자본주의적 괴물이 스스로 작동하는 시스템에 이끌려 움직이게 된다. 이런 대형 식품회사들이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노력으로 인해 '풍성하고 맛있는 음식을 즐길 권리'가 소수의 엘리트를 위한 것이 아닌 대부분의 인류도 동참하게 되었다.
20세기 들어 농업 생산성의 발전은 거의 모든 나라에서 이루어졌으며, 이로 인한 희생으로 생태계의 불균형이 일어나고 빈곤의 양극화도 발생하고 있다. 거대 식품 회사들의 지배적인 위치는 효율성과 생산성 향상만을 위하여 식물 종자와 동물 종의 유전적 다양성을 축소시켰고, 거대 식품회사의 효율적이고 통제 가능한 예측 기법은 단일 품종 생산과 고밀도 인공 축산업을 만들어 내고 광우병과 새로운 전염병에 취약한 환경을 만들어 내었다.
미국의 곡물회사인 카길(Cargill)사는 기상 예측과 정보를 위한 민간 위성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초거대 기업이며, 역시 미국의 닭고기 및 소고기 유통을 관리하는 타이슨 푸드(Tyson Foods)와 자회사인 소고기 유통회사 IBP(Iowa Beef Processors)는 전 세계의 닭고기와 쇠고기의 육종과 번식에 권한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거대 돼지고기 유통회사였던 스미스필드(smithfield foods)사는 중국인들을 위한 안정적인 돼지고기 공급을 위해 중국 회사가 되어 돼지고기 공급에 최우선 협상 대상이다. 다국적 종자회사인 몬산토(Monsanto)는 GMO(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종자를 생산하고 종자를 독점하기도 한다. 이들 기업들은 인류 생존에 필수적인 자원에 대한 통제권을 가지고 있고, 위에 열거한 환경과 양극화의 많은 부작용도 낳고 있다. 거대 식품기업들이 등장하면서 글로벌 경제 논리에 생산과 유통을 조직화하고 혁신이라는 기술을 면죄부 삼아 환경에 심각한 악영향을 끼치는 일도 발생하게 된다. 기업이익만을 위해 돌아가는 글로벌한 거대 기업의 생리구조는 휴머니즘을 축소시켜 다수의 이익을 위한 소수의 희생은 필수적 요소라고 여겨지는 듯하다.
현대의 지속 가능한 지구 환경을 살리기 위해서 인류 모두가 채식주의자의 길을 선택할 수는 없다. 20세기가 인류가 기아에서 해방된 시기였다면 21세기에는 지속 가능한 선택에 기로에 서있다. 거대 기업들은 살아있는 유기체적 구조로 몇몇 기업 CEO와 수뇌부가 결정을 하는 것이 아니다. 기업인과 정치가, 그리고 가장 힘이 센 우리 ‘소비자’들이 이들을 조정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