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주차. 시민혁명과 미식의 발달

시민혁명과 미식의 발달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의 인과 관계   

  

기계를 이용한 대량 생산 방식의 공장제 공업의 발달은 산업 자본주의를 확립했고, 시민들의 경제생활은 윤택해지고 풍족해졌다. 그러나 산업혁명이 긍정적인 결과만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비위생적인 도시문제가 대두되었고, 임금이나 장시간 노동, 열악한 노동환경, 아동착취 등으로 인한 노동문제가 발생하였다. 산업 혁명은 임금이 싼 어린이와 여성 노동자를 크게 증가시켰고, 노동자는 하루 14시간 이상의 살인적인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19세기 초반 영국 면직물 공장에서 일한 18세 이하의 청소년 노동자는 전체 노동자의 44%나 되었다. 산업혁명은 인간성 말살의 자본주의 확립을 가져왔고, 산업사회의 노동자의 불만이 거세지면서 ‘러다이트 운동’이 일어났다. 러다이트 운동이란 사회 빈민층이 셀 수 없이 많아지자 일부 시민들이 기계에 의해 일자리를 빼앗기고 있다며 사람들을 선동해 기계를 파괴하는 운동이었다. 또한, 노동자와 자본가의 대립으로 인한 자본론이 탄생하고, 사회주의 사상과 함께 공산주의 국가도 탄생시키는 이념의 시작도 대두되었다.

18세기 프랑스로부터 시작된 계몽주의 시대는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체제에 대하여 의문을 제기하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앙시앵 레짐은 1789년 프랑스혁명 전의 절대 군주 정체를 가리키며, 옛 체제라고도 부른다. 진보적 엘리트 집단이었던 계몽주의자들은 종교적, 정치적, 경제적 박해에 맞서 투쟁했으며 미국 독립전쟁과 프랑스혁명을 비롯한 18세기 말의 정치적 대격변에 큰 영향을 미쳤다.

trois ordres de l' ancien régime en1789,  

구체제 앙시엠 레짐의 대표적인 묘사로 왕족과 귀족에 안긴 성직자 밑으로 농민이 힘들게 버티고 있다.

18세기 프랑스의 시민혁명과 영국의 산업혁명을 ‘이중 혁명’이라고 일컫는데, 이는 서구사회에 경제적 자본주의와 정치적 민주주의가 도래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시민혁명은 자본을 바탕으로 한 새로운 신흥 귀족인 부르주아의 노력으로 정치적 변화를 가져오고 자유주의를 실현한 변혁이었으며, 왕족과 귀족계급에 대한 정치체제를 타파하고 시민계급이 주체로 떠오르는 근대사회의 길을 열었다는데 큰 의의가 있다. 하지만 인류의 자유와 평등, 인격 존중과 사회권 보장에 대한 시민혁명은 결과적으로는 실질적으로는 자본주의의 모순이 나타나고, 신흥 부르주아 계급만이 파이를 점령하게 된다. 시민계급이 일으킨 혁명이지만, 이때의 시민은 부르주아지로서 민중과는 구별되는 개념이었으므로 민중의 대부분인 농민과 노동자는 혁명의 혜택을 별로 받지 못했다. 산업혁명과 시민혁명은 부르주아에게만 권력을 가져다준 혁명이었다. 혁명 이후 부르주아가 경제와 정치를 장악하게 되었고, 선거는 제한 선거로서 유산계급만 선거권을 갖게 되었다. 혁명에 앞장선 농민과 노동자들에게는 참정권이 부여되지 않았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한 예를 들어, 1832년 개정 선거법을 시행하였으나 유권자는 전체 인구 30명 중 1인, 성인 남자 7명 중 1명만이 선거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1789년 바스티유 감옥의 전쟁으로 시작한 프랑스혁명은, 그 후 수많은 변천을 겪은 후 1815년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이 결정적으로 패배할 때까지 유럽 전체를 혼란스럽게 만들었으며, 앙시앵 레짐 시대의 수많은 요리사들과 제과사들이 새로운 직업군을 만드는 계기를 만들게 되었다.       

   


나폴레옹 시대와 파리의 대도시화     


파리의 역사는 기원전 259년부터 센 강 유역에 정착한 켈트족에 의해 시작되었다고 알려진다. 로마 시절 루테미아(Lutetia)라고 불리다가 4세기에 이르러 현재의 이름인 파리(Paris)로 이름이 바뀌었다. 그 후 프랑크 국왕 클로비스 1세가 제국의 수도로 정해지면서 파리는 점차 번영의 도시로 발전하게 된다. 중세를 거치며 파리는 노트르담 대성당을 건축하며 유럽에 고딕 양식의 탄생을 알리며 영국과 독일에 중세 건축양식의 특징인 고딕 성당을 유럽에 퍼트렸다. 또한, 파리는 유럽의 주요 학습 중심지가 되어 수많은 학자와 신부, 학생들이 영국, 독일 및 이탈리아에서 몰려들어 지적 교류를 이루는 도시로 발전하기도 했다. 파리의 첫 번째 카페는 1672년에 문을 열었으며 1720년대에 파리에는 약 400개의 카페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카페는 도시의 엘리트들과 사상가와 학자, 학생들을 위한 만남의 장소가 되었다. 엘리트들이 파리에서 성장하면서 계몽주의 사상도 파리에서 발전하게 되고 드디어 시민혁명의 발화가 파리에서 시작되었다.

나폴레옹은 개선문(Arc de Triomphe)을 중심으로 강력한 군대를 지닌 프랑스와 새로운 파리를 꿈꿨다.

1789년 프랑스 시민혁명 이후, 나폴레옹이 등장하면서 프랑스는 다시 왕정 시대로 복귀한다. 나폴레옹은 황제가 되고 나서 프랑스의 수도 파리를 제국의 수도로 만들기 위한 일련의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도시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였다. 오래된 수녀원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광장과 파리 중심을 연결하는 새로운 거리를 건설했다.  높이 50에 이르는 거대한 개선문(Arc de triomphe)이 기공되어 그의 사후 준공된다. 파리에 도로정비 사업을 필두로 분수를 설치하고 묘지를 정리하였으며, 센강에 혁신적인 철교를 건설하고 시장, 강변 구역과 제방 및 공공시설과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정비하였다. 프랑스 위인들의 동상이 거리 곳곳에 세우고, 교량을 건설하며 파리가 유럽의 새로운 로마가 되기를 바랐다.

1806년 고대 로마를 모방하여 나폴레옹은 프랑스의 군사 영광을 위한 일련의 기념비 건설을 명령했다. 가장 큰 것은 개선문으로 나폴레옹의 병사들은 회전목마 형태의 광장을 둘러싼 대규모 퍼레이드로 승리를 축하했다. 나폴레옹은 도시의 인프라를 구성하기 위해 도시로 신선한 물을 공급하는 운하 건설을 시작하고 저수지를 건설했다. 담수를 파리 시민들에게 분배하기 위해, 유럽에서 가장 큰 분수대를 만들기도 하였다. 나폴레옹의 새로운 파리 건설로 파리의 인구는 시민혁명 당시 50만에 불과하던 인구가 1848년에는 100만 명의 대도시로 성장했다. 인구의 도시 집중으로 신흥 공업 지구가 형성되고 파리는 규모는 크게 발달하였다. 나폴레옹 통치 동안 프랑스혁명에서 폐쇄된 교회와 수녀원에서 가져온 건물과 땅을 이용하여 최초의 대규모 산업들이 도시 외곽에서 번성했다. 대형 섬유 공장이 건설되었으며, 사탕무를 사용한 최초의 설탕 정제소가 개설되었다. 철과 청동 주조 공장 화학 공장이 들어서며 많은 사람들이 고용되었다. 근대 초기부터 파리에는 많은 장인이 프리미엄 제품 특히 의류, 시계, 고급 가구, 도자기, 보석류 및 가죽 제품을 생산하여 세계적 명성을 떨쳤다.

도시화와 공업화에 따라 공장이 늘어나면서 공장 근로자들을 수용하기 위한 지구들도 급조되었다. 갑작스러운 인구증가는 항상 도시 빈곤이 수반되었는데, 그에 따른 불량 주택, 질이 낮은 음식, 비위생적인 환경 등에 의한 희생자들이 증가하기도 하였다. 파리의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노동 계급 이웃의 불만도 커졌고,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1968년 프랑스 파리는 5월 ‘68 혁명’으로 알려진 현대 시대의 새로운 민주화 운동까지 시발점으로 작용하며 오늘날 우리에게 민주화의 시민혁명 도시로도 알려져 있다.          



외식 레스토랑의 탄생     


현대식으로 이해되는 식당은 18세기 말까지 존재하지 않았다. 웨이터와 고정 메뉴가 있는 식사를 위해 특별히 공공 식당에 앉아있는 것은 요리 역사상 비교적 최근의 개념이다. "

— Wyatt Constantine, 식당 및 현대 요리법의 탄생     


파리는 19 세기 중반 런던에 이어 국제 금융 중심지로 부상했다. 수많은 공격적인 민간주도의 은행이 설립되었고, 런던과 맞먹는 세계 최고의 금융 중심지가 되었다. 파리에는 자본이 출렁이고 수많은 지식인이 모여들었다. 1800년대 후반 파리는 5개의 국제 박람회를 개최하여 수백만 명의 방문객을 끌어 모으며 점점 더 중요한 기술, 무역 및 관광 중심지로 발전해 갔다. 나폴레옹 3세가 주최한 1855년 세계 박람회는 샹젤리제 옆 정원에서 개최되어 프랑스 산업과 식문화의 성과를 보여주기에 충분한 역할을 해냈다. 박람회에서는 와인 선진국답게 보르도 와인의 분류 시스템 등을 선보이며 프랑스 와인과 음식에 대한 특별함을 유럽에 알렸다. 이렇듯 기술의 발전과 산업화, 도시화는 미각의 발전을 이끄는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오르기 전에도 식당은 수천 년 동안 존재해 왔었다.

초기 문명부터 이윤을 위한 식품판매는 존재했지만, 도시의 성장과는 관련이 없었다. 공공 식당은 로마 제국부터 근대 이전까지 도시의 시장으로 농업 생산품을 교역하는 농민, 여행자들을 위한 가장 초기 형태의 여관과 함께 존재했었다. 여관과 주점은 단순한 식사 장소 이상의 의미가 있었고, 사람들을 모여서 다른 지방의 소식과 세상을 접하는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했다. 하지만 여기서 여행자들은 공용 식탁에서 매일 밤 요리사의 메뉴에 따라 식사를 하였고, 선택할 메뉴나 옵션이 없었다.

Workshop with Shoemaker, Butcher, and Lacemaker – Jan Josef I Horemans

1765년에 블랑제(Boulanger)가 루브르 박물관 근처에서 양고기 스튜를 팔면서 조리된 고기음식을 파는 식당이 시작되었다. 중세부터 봉건체제 아래의 프랑스 전역에서 길드는 음식 준비와 판매에 대한 독점권이 있었다. 예를 들어, 육가공업자(샤퀴테리, charcutiers)는 동물을 도살하고 정육한 고기를 판매하는 길드 조합원이었다. 특정 길드에 속하지 않은 경우 고기를 어떤 형태로든 판매하는 것은 불법이었다. 샤퀴테리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그가 판매한 양고기 스튜는 당시의 법으로는 불법이었으므로 샤퀴테리 길드가 그를 고소했지만, 블랑제가 재판에서 이기게 되었다. 이후, 프랑스혁명으로 이어지는 20년 동안 길드는 몰락하였고, 블랑제와 같은 식당이 더 많이 파리에서 문을 열게 되었다.

기술혁신이 가속화되고 자본주의가 확산하면서 숙련공 중심의 수공업 길드들은 새로운 대세가 된 비숙련공과 기계의 조합에 비해 생산효율에 미치지 못하자 몰락하기 시작했다. 특히 1791년 봉건적 소유관계와 경제활동에 대한 봉건적 규제를 폐지하는 '노동의 자유에 관한 선언'으로 억압적인 길드 체제는 본격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곧이어 1840년 스페인, 1859년에 독일, 1864년에 이탈리아에서 길드를 폐지하는 법령이 제정되었다.

혁명의 시절이 지나가자 길드는 완전히 무너지고 귀족, 심지어 왕실에서 일하는 많은 요리사들이 실업자로 전락했다. 거리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요리사와 파티시에들은 새로운 일자리를 찾았고, 자본가들과 급변하는 시대 속에 파리를 관광 온 수많은 관광객이 만나 레스토랑이라는 새로운 음식을 파는 공장을 만들어 내었다. 바로 이것이 레스토랑(restaurant)의  시작이었다.

당대의 왕족과 귀족의 유명한 요리사들은 파리에 자신의 식당을 개설하여 새로운 방식의 음식을 제공했다. 시누아즈리의 유행으로 인한 중국 도자기로 장식된 귀족적인 식사 공간, 화려한 커틀러리와 하얀색 식탁보, 귀족 식사문화 공간은 프랑스의 새로운 시민계층인 자본가와 중산층에게 열리게 되었다. 메뉴는 귀족적인 요리를 본받아 세련되고 다양해진 일품요리들을 제공하였다. 나폴레옹 시대 이후, 유럽 최고의 도시 파리에는 많은 사람이 몰려들었고, 역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먹고 마시고 사교하는 장소로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 파리의 고급 레스토랑이 출현하면서 곧 유럽 전역과 미국으로 확산하였다.               



프렌치 퀴진, 프랑스를 넘어서 세계로     


자동차 기술이 발달로 유럽 내의 새로운 자동차 전용도로의 건설되고, 장거리 여행이 용이해지면서 부유한 유럽인들이 파리로 몰려들었다.  파리는 이러한 새로운 부류의 사람들을 수용하며 고급 레스토랑이 부상하였다. 혁명 이전에는 파리에 50개 미만의 식당이 있었으나 1814년까지 파리에는 3,000개의 레스토랑이 문을 열었다.

프랑스는 새로운 레스토랑의 개념을 만들고, 요리사들은 그들의 업소에 상류층이 선호하는 손길을 더했다. 선술집과 여관에서처럼 공용 테이블에서 식사할 필요가 없었으며, 새로운 개념인 ‘예약제’로 자신이 원하는 예약된 테이블에 손님이 앉을 수 있었다. 시간과 관계없이 음식을 제공하였으며 자신이 원하는 요리를 선택할 수 있었고 식사가 끝나면 손님에게 청구 금액을 계산하는 수표가 제시되는 ‘레스토랑’ 서비스가 확립되었다.

또한, 19세기에는 테이블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는 레스토랑 스타일의 카페가 등장했다. 고객은 카운터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스스로 가져다 먹는 셀프서비스도 등장했다. 파리의 카페는 저렴한 가격으로 가정식 요리를 제공하며 하층 노동 계급 구성원까지 끌어들였다.     

카렘의 파이와 케이크 등 디저트 디자인, 그는 디저트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선보였으며 디저트를 만드는 일은 건축의 설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전문 요리사가 만든 레스토랑들은 많은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중 19세기를 대표하는  인물이 ‘왕의 요리사, 요리사의 왕’으로 불렸던 앙토넹 카렘(Antoine Carême)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유명한 외교관이었던 탈레랑의 요리사로 시작하여 나폴레옹과 러시아 왕족, 당대 최대의 은행가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요리를 담당하면서 유럽 상류층에 요리에 대한 새로운 형식과 유행을 전파했다. 탈레랑은 당시의 최고의 미식가이자 와인 전문가였고, 당시 최고의 화술과 외교능력을 펼친 프랑스 외교관이었다. 당시 최고의 권력가인 탈레랑은 카렘과 그의 요리와 미식에 관한 토론으로 매일 한 시간씩 보냈다고 전해진다.

특히, 1814년 9월 1일에서 1815년 6월 9일까지 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논의한 비엔나 회의(The Congress of Vienna)가 열리면서 탈레랑은 이 회의의 호스트가 된다. 이 회의의 목적은 나폴레옹 전쟁의 혼란을 수습하고, 유럽의 상태를 전쟁 전으로 돌리는 것이 목표였다. 탈레랑은 유럽지도를 바꾸었고, 카렘은 비엔나 회의의 다양한 연회를 담당하면서 유럽 연회의 연출과 형식, 유럽 상류층의 요리 입맛도 바꾸어 놓았다.     

앙토넹 카렘 현대 프랑스 고전 요리의 형식을 완성했다. 그는 과거의 궁정의 화려하고 너무 많은 소스에 의존하는 요리의 낡은 관습을 탈피하고 제철 농산물을 이용한 허브와 신선한 채소를 이용한 요리법과 간단한 소스를 사용하여 새로운 세련된 음식 스타일을 선보였다. 그리고 파이와 케이크 등 디저트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선보였으며 디저트를 만드는 일은 건축의 설계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프랑스 요리의 새로운 소스와 요리를 디자인했으며, 모든 소스를 4개의 모체 소스(mother sauce)로 기준으로 하여 소스를 그룹으로 분류했으며, 이는 현대에도 여전히 서양 조리의 기본이 되고 있다.

카렘은 러시아식 서비스를 프랑스 식사에 도입하여, 현대 서양식 식사의 기준을 마련했다. 러시아 궁정에서 일한 경험으로 당시 프랑스 연회에서 모든 요리를 한 번에 제공하는 ‘공간 전개형’ 방식의 식사를 러시아식 서비스 방식으로 바꾸었다. 러시아식 서비스는 메뉴에 인쇄된 순서대로 각 요리를 제공하는 코스 형식으로 현대 서양요리의 특징인 ‘시간 전개형’ 식사 방식이다.  추운 날씨의 러시아 궁정에서 모든 음식을 한꺼번에 차리는 공간 전개형 방식의 연회 음식은 너무 빨리 식었다. 이러한 단점을 개선하기 위해 러시아식 서비스는 음식에 순서를 두어 테이블 위에 한 가지씩 요리가 제공되고, 따듯한 접시 위에 나누어 담아 제공하여 따듯한 음식을 먹을 수 있도록 하였다. 이러한 식사 방식은 더 많은 서비스 인원과 식기를 필요했기 때문에 부유한 사람들만이 감당할 수 있는 선택이었지만, 테이블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져 더 많은 시간과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장점으로 상류사회의 식사방법으로 선호되었다.

또한, 카렘은 현대 요리사의 흰 원통형의 표준 요리사 모자인 ‘토크 블랑셰’(white hat)를 만들었으며, 하얀색 조리사 복장을 공식화했다. 하얀색 요리복은 청결함을 상징했으며, 조리사 모자의 높이는 주방 직원들의 등급을 나타내었다. 카렘의 모자는 키가 18인치(46센티)였고, 모자에는 100개의 주름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토크 주름의 의미는 계란 요리를 할 수 있는 조리법의 숫자를 나타낸다. 그는 대표적인 저서 프랑스 요리의 기술(L'Art de la cuisine française)과 여러 저서들을 통해 오늘날 우리에게 요리사와 이론가로서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미식, 가스트로노미의 등장         

 

먹을 것을 선택할 때 무조건적으로 본능을 따르는 동물과는 반대로 인간은 ‘맛’이라는 미각적  선택의 인식에 직면한다. 이러한 특성은 인간과 동물을 나누는 중요한 특성으로 ‘미식학(Gastronomy)’이라는 학문을 탄생시켰다. 앙토넹 카렘 시대 요리와 미식은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요리사가 좋은 식재료로 요리기술을 더해 맛을 창조하는 직업이었다면, 요리의 미식 문학인 가스트로노미는 프랑스혁명 이후, 부르주아들 특히, 식탁예절과 에티켓에 무지한 신흥 부자들을 겨냥하여 식사 예의와 교양을 가르치는 문학이 등장한다.  곧 가스트로노미는 신흥 부자들의 지지 속에 새로운 시류의 문학이 되어 비싼 음식을 소비할 수 있는 능력이 되며 글을 잘 쓰는 사람들의 직업이 되었다. 카렘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극도로 싫어했지만 미식학은 혁명을 통해 등장한 신흥 계급사회의 새로운 제도를 합법화하는 수단이 되어 신흥 부자들을 위주로 퍼져 나갔다.

프랑스혁명으로 부를 재분배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계층으로 떠오른 부자들이 생겨났다. 대부분의 졸부들이 그렇듯 예의와 매너를 지키기보다는 동물적인 쾌락과 자기 과시를 우선시했다. 이런 유의 미식학적 문학들은 부르주아들에게 가정교사가 되어 자신이 과거의 미천했던 신분이 아닌 새로운 신분으로의 세탁을 도왔다. 세련된 식탁예절과 매너는 경험과 교육으로 체화되어 새로운 지배체제에도 전달되었다. 미식법은 구지배층과 신흥 부자들에게 똑같은 원칙을 제시하여 두 집단을 융화시키는 수단이었다.

그리모 레이니에의 ‘미식가들의 연감’을 필두로 미식법 창설의 아버지로 불리는 브리아 샤바랭도 미각의 생리학을 출판했다. 브리야 샤바랭은 미식법을 통합의 과학, 인간의 영양과 음식에 관한 모든 질서와 훈련을 아우르는 분석적 지식이며 학문이라 정의했다. 그는 미식은 쾌락과 건강을 동시에 제공해야 하며, 음식을 즐기는 일은 더 이상 죄악이 아니라고 주장하며 미식을 음식에 대한 폭식과 탐욕으로 분리해내야 한다고 말했다.

미식학이라는 새로운 담론과 문학의 탄생과 파리의 레스토랑의 증가는 1835년 프랑스 아카데미 사전에 ‘레스토랑 : 식사 제공용 시설’이라는 뜻으로 공식 등록되었다.  

레스토랑의 출입은 곧 사회의 계급을 정의하는 행위였다. 가장 비싼 오트 퀴진을 소비하는 계층은 사회의 최상류 층으로 분류되었으며 팔레 루아얄 주변에 집중되었다. 이런 레스토랑은 극소수였으며 일반인들도 즐겨 먹을 수 있는 정가의 요리들과 수프를 파는 레스토랑들이 샹젤리제 거리와 파리 곳곳에 생겨 났다. 맥주 등 저렴한 술과 함께 음식을 제공하는 '브라스리'라는 형태의 선술집도 급속히 늘어났다.      

쥘 그린(Jules grun)의 1913년 작품 식사의 끝(The End of Dinner)은 당시의 상류층 부르주아의 식사 장면을 세세하게 보여준다.      

Jules grun, The End of Dinner. 1913

19세기 팔렌 백작의 수석 요리사인 플루메리는 당시의 상류층 부르주아는 식탁 장식과 테이블 세팅을 이렇게 서술했다.

“다이닝룸의 가구들 사이에 넓은 식탁이 중앙에 위치한다. 식탁천은 반드시 하얀색으로 해야 하며 실내 장식의 핵심으로 작용하며 하얀 식탁천은 식탁 다리를 2/3 이상 덮어줘야 한다. 겨울에는 난로로 난방해 주어 온화하고 일정한 수준의 온도를 유지해야 한다. 다이닝룸은 대리석이나 석토(돌바닥)으로 처리하고, 겨울에는 카펫을 깔아주어야 한다. 천정에는 아름다운 샹들리에를 걸고, 테이블에는 꽃으로 장식하며 은촛대와 은으로 된 커틀러리와 쟁반으로 장식한다. 각 손님마다 4개의 크리스털 유리잔을 준비하여 와인과 음료를 서브하는데 음료를 바꾸어 줄 때마다 교체해야 하고 유리잔이 식탁에 동시에 나와 있으면 안 된다. 그리고 제복을 입고 하얀 장갑을 낀 메르트 도텔(웨이터)들이 각자의 정해진 위치에 자리에 서서 다음 서비스를 준비한다.”



요리를 체계적인 직업으로 만든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오귀스트 에스코피에(Georges Auguste Escoffier)는 프랑스의 요리사, 외식 기업가 및 조리서 작가로서 전통적인 프랑스 요리법과 주방 조직을 체계화하여 직업인으로서의 요리사를 교육시킬 수 있는 교육체계를 완성하였다. 에스코피에의 요리 기술 대부분은 프랑스 고급 요리를 집대성한 앙토넹 카렘의 기술을 기반으로 하지만 카렘의 정교하고 화려한 스타일의 귀족적인 음식문화를 단순화하고 현대화하는 것이었다. 그는 고급 요리 연출에 기념비적인 장식을 극대화한 화려한 장식을 배제하고, 접시에 먹을 수 없는 장식을 제거했다. 또한 소스를 중요시하던 관습에서 탈피하여 음식 본연의 모습인 음식 자체로 아름다워 보이도록 하였다. 

주방 관리에 대한 에스코피에의 레시피와 기술 및 접근 방식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영향력이 높으며, 프랑스뿐만 아니라 전 세계 외식업계와 요리사에 의해 채택되어 전해진다.

1902년 프랑스 요리를 집대성한 ‘르 가이드 컬리너리’(Le guide culinaire)은 프랑스 요리의 성경과도 같은 책으로 프랑스 요리의 변혁을 이끌었다. 이 책에는 프랑스 요리의 집대성으로 5,000개의 레시피가 수록되었고, 오늘날에도 고전 요리를 위한 요리책과 교과서로 사용된다. 그가 기록하고 발명한 레시피와 함께, 요리에 대한 에스코피에의 또 다른 공헌은 주방을 조직화된 훈련을 도입함으로써 사회적으로 존경받는 직업의 상태로 높인 것이었다. 그는 주방 직원들이 존중받는 직업인이 되길 바랬다. 주방 안에서는 욕설을 금지하고, 큰소리로 떠드는 것을 금지하였고, 요리사들이 출퇴근할 때 양복을 입고 출근하기를 바랐으며 교양인이 되길 바랐다. 당시에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것이 그런 것들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주방 운영을 원활하게 운영하기 위해 최초로 ‘주방 체계(Brigade de cuisine)’를 도입하여 광범위한 주방 직원을 고용하는 식당과 호텔 시스템에 주방 인력의 구조를 체계화하였다. 에스코피에에 의해 구조화된 인력 시스템은 단위 주방의 특정 업무를 전문화하고 권한을 위임하여 각각의 주방들이 모인 대형 주방의 유기적인 업무가 처리될 수 있도록 하였다. 오늘날에도 대부분의 현대 서양 주방은 에스코피에의 ‘주방 체계(Brigade de cuisine)’ 시스템에 의해 작동한다. 아래와 같은 체제로 운영된다.     


 

에스코피에의 주방 체계(Brigade de cuisine)


 

총주방장(Executive Chef)

총주방장은 주방 계층의 맨 위에 있으며 역할은 주방 관리와 경영이다. 요리에 관한 부분보다는 전반적인 인력관리와 재정관리가 주 업무이다.


주방장(Chef de Cuisine, Head Chef)

'주방장'은 프랑스어로 'Chef de Cuisine'이라는 단어를 번역한 것으로다. 일반적으로 주방 전체와 관련된 관리 업무에 중점을 둔다. 예를 들어 주방 직원을 감독 및 관리하고 비용과 식재료 관리, 구매업무와 새로운 메뉴를 만든다.


부주방장(Sous Chef)

부주방장은 주방장을 도와 많은 책임을 공유하지만, 주방에서 일상적인 작업에 훨씬 더 관여하게 된다. 부주방장은 주방장이 없을 때 주방장 역할을 대신한다.


스테이션 주방장(Chef de Partie, Station Chef)

음식이 완성하려면 여러 가지 분야의 준비된 음식이 순서화된 코스나 한 접시에 담아지는 것을 의미한다.

주방 운영의 생산성이 향상되고 바쁜 시간에 많은 양의 식사를 하려면 주방시스템은 각 부분별 여러 가지 역할로 나뉘는데 각 부분별 주방장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소시에(Saucier/Sauté Chef)라고 불리는 요리사는 음식을 볶는 역할과 함께 소스와 육수를 만드는 역할을 하고, 부쳐 셰프(Butcher Chef)는 육류 및 가금류를 각 역에 배달하기 전에 준비한다. 그리고 생선 요리사(Poissonnier), 고기를 굽는 로티셰르(Rotisseur, Roast Chef), 에피타이저와 샐러드등 차가운 요리를 담당하는 가르드 망저(Garde Manger), 디저트를 담당하는 파티시에(Pattisier, Pastry Chef)등 특정 직무를 가진 요리사들이 부분별 주방장 역할을 한다.


주니어 요리사(Commis Chef)

주니어 셰프(Commis Chef)는 각 부분별 주방장을 돕고 협력하여 특정 스테이션의 주방 업무 내용을 익힌다. 주니어 셰프는 일반적으로 최근 정식 교육을 완료했거나 참여하는 초보 요리사이다.


주방 포터(Kitchen Porter)

키친 포터는 주방의 기본 작업을 지원하며 역할은 일반적으로 양파와 감자 등 껍질 벗기기와 같은 주방 입문 업무와 음식 준비 및 주방 청소 업무 등을 지원한다.


디시 워셔(Dishwasher)

디시 워셔는 접시를 닦는 역할을 하며 주방 접시의 정리와 주방기구를 정리 정돈하는 역할을 한다.  


Cesar-Ritz-and-Auguste-Escoffier-at-the-Savoy

1888년 에스코피에는 스위스의 호텔 경영가인 세자르 리츠(César Ritz)는 몬테카를로의 그랜드 호텔에서 만나게 된다. 당시 세자르 리츠는 몬테카를로의 그랜드 호텔의 지배인으로 왕가의 서비스를 호텔에 접목하기 시작한 인물로 당대의 최고 유명 요리사인 오귀스트 에스코피에와 손잡고 본격적으로 호텔업을 시작한다. 두 사람은 파트너십을 맺었고 1890년 런던의 사보이호텔로 이직하여 런던의 사보이 호텔을 세계 최고 호텔의 반열에 올렸다. 세자르 리츠는 48세 되던 해인 1898년에 파리 방돔 광장에 베르사유 궁전을 본뜬 호텔 리츠 파리를 개업했다. 호텔 리츠 파리는 호텔 역사상 최초로 각 객실에 욕실과 전화기, 붙박이장 등을 설치했다. 리츠는 '작지만 아름답게', '고품질의 최고급 서비스', '고객 절대 만족'을 모토로 런던과 마드리드에 리츠호텔을 개업했다. 다른 고급 호텔도 곧 유럽 전역에 나오기 시작했다.

세자르 리츠는 당시 최고의 금융도시인 런던 정복을 위해 호텔 직원을 ‘작은 군’ 체제로 묘사하며 정리했다. 에스코피에 역시 주방 조직을 군 조직화하고, 군 조직 여단(Brigade)을 만들고, 주방 시스템을 ‘여단 요리사(Brigade de Cuisine)’라고 불렀다. 이들 호텔들은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병원으로도 사용돼 ‘쉬고 치료하고 머물다 가는 곳’이란 의미로 호텔과 관광업은 이후 병원을 뜻하는 ‘hospitality industry’(환대산업)으로 발전한다.

리츠와 에스코피에의 만남은 럭셔리 한 숙소와 미식가를 한 지붕 아래에서 만족시킬 수 있는 장소를 의미했다.


1913년, 에스코피에는 독일의 고급여객선 SS Imperator호에서 당시 프로이센의 황제인 빌헬름 2세와 고위급 독일인들을 위한 만찬을 준비하였다. 당대 최고의 기념비적인 저녁 식사를 마치고 빌헬름 2세가 에스코피에를 불러 "나는 독일의 황제이지만 당신은 요리사의 황제"라고 말하며 이것이 언론에서 자주 인용되었으며, 요리사로서 에스코피에의 명성을 더욱 확고히 했다. 당시 여객선에는 한 명의 검은 눈동자를 가진 마르고 키가 큰 동양인도 에스코피에를 도와 주니어 셰프로 디저트를 준비하고 했는데, 그는 나중에 베트남의 지도자인 ‘호찌민’이 된다. 에스코피에는 호찌민에게 “이봐 젊은 친구, 혁명을 생각하지 말고, 빵을 만드는 기술을 배우면 베트남 최고의 부자가 될 수 있다네”라며 농담을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의 유명한 주방 직원 중 아키야마 도쿠조로 히로이토 일왕과 함께 유럽을 연수하며 요리를 배웠다. 아키야마는 일본에 귀국한 후 일본에 프랑스 요리를 전파하며, 일본의 에스코피에로 불리며 일본인들의 프랑스 음식에 대한 사랑을 불러일으켰다. 현대에도 프랑스를 제외한 가장 많은 프랑스 식당이 있는 곳은 일본이다.

Escoffier는 1935년 2월 12일에 88세의 나이로 아내가 사망한 지 일주일도 안 되어 사망하고 가족 묘지에 묻혔다.                



19 세기말, 여행 산업의 발전은 호화로운 관광 여행을 가능케 했으며 여행자들은 집을 떠나 그 지방의 맛있는 음식을 먹고 경험해보고 싶어 했다. 여행에서의 식사는 단순한 필수품이 아닌 여행을 떠나는 목적이자 경험해보고 싶은 예술 품목 중의 하나가 되었다. 여행 일정의 일환으로 유명한 파리 카페와 레스토랑에서의 식사가 포함되었으며, 파리의 식당들은 훌륭한 음식과 서비스로 명성을 얻었으며, 에스코피에와 프랑스 음식과 레스토랑 문화는 세계적으로 진출했다. 그리고 여행업의 발전은 환대산업의 발전을 이끌고 호텔과 리조트, 카지노 등 관광산업과 더불어 성장하고, 이러한 영향으로 세계의 음식은 하나로 융합되고 있었다. 미국과 유럽 아시아를 포함하여 전 세계적으로 프랑스 고급식당이 존재하고, 이태리의 피자를 먹을 수 있었으며, 중식당에서 동파육을 먹을 수 있는 시기가 20세기에 도래하게 된다.

미국에서의 레스토랑은 변화하는 소비자의 요구에 맞게 곧 진화했다. 미국의 식당들은 서비스라는 새로운 방식의 상품과 합쳐져 세계를 프랜차이즈 식당과  거대한 패스트푸드의 시장으로 발전하며 더 큰 외식업의 발달을 초래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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