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주차. 콜롬버스의 교류와 대항해시대


범선의 발전과 대항해시대(Age of Discovery)의 시작     


대항해시대는 유럽인들이 새로운 교역로와 부, 지식을 찾아 바다로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한 시기로 많은 국가들이 은과 금과 같은 상품을 찾고 있었지만 탐사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향신료와 실크 무역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이 1453 년 콘스탄티노플을 장악하고, 동유럽에 대한 서유럽의 접근을 막혀 실크로드와 인도로 가는 홍해 해상 무역 등에 대해 심각하게 제한되었다.      

대항해 시대의 시작은  아랍에서 유럽으로 나침반이 유입되는것으로 시작된다. 중국에서 발명된 나침반은 인도양을 통해 이슬람 세계에 전해지고, 다시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유럽으로 전해졌다. 나침반의 전파는 해와 별의 감각으로 방향을 찾던 항해술에서 더욱더 정교한 항해술과 지도를 만들 수 있는 계기가 된다.

이베리아 반도의 독립운동인 레콩키스타 운동이 끝나고, 15 세기 초 이슬람의 기술을 물려받은 포르투갈의 해상 무역활동은 실질적인 항로 탐색에서 뚜렷한 진보의 시대를 열었다. 당시 항해사가 사용할 수 있는 도구는 나침반, 별자리 지도, 북극성에 기반한 초보적인 해상 차트를 수정하는 방법이었지만 신항로를 위한 목숨을 건 도전정신은 이어졌다. 이러한 도전정신은 곧 해상 항해를 위한 바람과 해류의 정보를 수집하고 경험적 관측을 결합하여 원양항해를 위한 해양 항법의 기술의 주도권을 포르투갈이 얻게 되는 역사로 귀결된다.


포르투갈의 국왕 요한 2세는 계속된 항해기술 발전을 위해 항해위원회를 구성하고 태양의 위치를 계산하여 위도를 판단하는 능력을 향상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항해술에 관한 책으로 출간되고 라틴어와 스페인어로 번역되어 유럽으로 확산되었다. 포르투갈은 정확한 방향설정과 항해술 덕분에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로 가는 항로와 아프리카를 돌아 인도와 동남아시아, 동북아시아로 가는 항로를 발견하는 등의 다양한 지리상의 발견을 이뤄낸다. 포르투갈인들은 대서양의 해류와 무역풍을 발견하여 아프리카를 우회하는 항로를 거쳐 동남아시아와 1542년 일본까지의 해로를 개통하고, 극동아시아를 선회하여 유럽으로 돌아올 수 있는 항로를 개척했다.

1502 년 익명의 지도 제작자에 의해 만들어진, 대항해시대의 세계관을 보여준다.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지역을 탐사 및 개발해서 막대한 이득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을 스페인의 이사벨 1세 여왕이 목격하면서 스페인도 대항해시대에 동참하기 시작한다. 이사벨 1세는 신항로 개척이 스페인의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거라 확신하고 콜럼버스의 탐험 계획을 지원하고 신세계를 발견하는 초석을 마련했다.  콜럼버스는 인도에 도착하는 대신 오늘날 바하마를 발견한다. 콜럼버스는 죽을 때까지 바하마 제도를 남중국으로 알고 있었으며 중국 황제에게 전해줄 여왕의 친서도 가지고 있었다. 그후 영국과 프랑스 또한 바다를 가로질러 새로운 무역로와 땅을 찾기 시작하는데, 1497년 탐험가 인 존 캐벗(John Cabot)은 뉴 펀들랜드 해안으로 여겨지는 곳까지 도달했다. 1524 년 허드슨 강 입구를 발견한 지오반니 다 베르라자노 (Govanni da Verrazano)와 1609년 맨해튼 섬을 처음으로 발견한 헨리 허드슨(Henry Hudson)을 포함하여 많은 프랑스인과 영국인들이 북아메리카 지역을 발견했다.    


대항해시대는 유럽인들이 새로운 교역로, 부, 지식을 찾아 바다로 세계를 탐험하기 시작한 시기로 많은 국가들이 은과 금과 같은 상품을 찾고 있었지만 탐사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향신료와 실크 무역을 위한 새로운 길을 찾는 것이었다.


대항해시대를 이끈 가장 큰 기술적 요인을 꼽으면 단연 범선의 발전이었다. 대항해시대에 이르러 빠른 이동과 많은 물자를 수송하기 위해 많은 돛을 추가한 대형 범선이 등장한다. 범선이 나오기 이전의 선박인 노를 저어 이동하는 갤리선은 전투함으로서의 기능은 훌륭하였지만 물자를 이동시키는 상선으로서의 역할은 할 수 없었다. 화물을 실어야 하는 자리에 노를 젓는 선원들이 자리를 하고 있었으며, 선원들을 위한 식량과 물 등이 화물 적재공간을 희생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무역을 위한 범선의 등장은 필수적이었다.  


카락선(Carrack)의 내부구조는 선박의 넓이와 선체가 깊어  많은 화물과 인력을 수용할 수 있다.


포르투갈인들은 아랍의 인도양 무역에 사용되던 돛대가 하나인 소형 범선 다우선(Dhow)을 마스트(돛대)의 수를 2~3개로 늘려 뛰어난 기동성 캐러밸(Caravel) 선으로 발전시켜 나갔다. 캐러밸선은 빠른 속도와 방향을 바꾸기 쉬운 조타 능력을 발휘하여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 항로를 개척하는 데 큰 역할을 한다. 하지만 캐러밸선은 배의 크기가 작아 해상재해에 취약한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스페인은 캐러밸선의 단점을 수정하여 정방형의 사각 돛을 가진 대형 범선을 만들었는데, 대서양의 높은 파도에 선체의 안정을 유지하고 대량수송이 가능한 선창을 가진 원양항해에 적합한 카락(Carrack) 선을 만들었다. 하지만 카락선은 대형 크기의 규모로 인하여 장비와 물자 인원들을 필요로 하여 원양항해에는 안정적이었으나 장거리 항해에는 불리하여 경량의 캐러밴선과 함께 함대 형식으로 장거리 항로를 개척했다. 3개의 마스트를 가진 범선으로 최초의 대서양 횡단을 성공한 콜럼버스의 산타마리아호(santa maria)도 카락선에 해당한다.   

나침반과 거대 원양어선인 카락은 대서양 횡단을 가능케하는 기술적인 터전을 만들어 이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유럽-아메리카 항로의 개척, 바스코 다 가마의 아프리카 남단을 통한 인도항로의 개척, 그리고 페르디난드 마젤란의 세계일주 항해를 가능케 했다.      

태양의 궤도를 기준으로 삼고 고도를 보면 측정이 가능한 위도와는 달리, 경도는 지구가 하루에 한 번씩 돌기 때문에 측정이 곤란하고 마땅한 기준도 없었다. 항해를 위해서는 경도의 정확한 측정이 필요한데, 항해 중 경도를 결정하려면 정확한 시간 관리가 필요했고, 이러한 초기 항법에 사용한 시계는 물시계와 모래시계였기 때문에 정확한 시간을 요구하는 항로 계산을 위해 유럽의 시계산업 발전에도 영향을 미쳤다.

대항해시대의 조선술과 항해술의 발전은 유럽 열강들의 기존의 보편적인 경계선을 넘나드는 것을 쉽게 하였다. 또한 아프리카에서 인도로 가는 향신료의 루트를 통해 아시아까지 항로를 확장하고, 결국 아메리카 대륙까지 가는 새로운 항해 루트를 개발했다. 유럽의 시각으로서는 이와같은 세계화는 많은 이득을 낳았는데, 차, 실크 그리고 설탕과 같은 새로운 물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또한 실크로드 등의 한정된 교역만을 이어가던 육상 무역에서 바다를 통한 교역이 늘어난 전환기의 시기라 할수 있다.  바다를 통한 무역의 발전은 동서양이 교역하는 육상 통로인 실크로드를 퇴화시켰으며, 식민지를 건설하는 열강들의 제국주의 시대로의 비극적인 역사의 서막을 여는 아픈 역사의 시작이기도 하다.



콜럼버스의 교류(Columbian Exchange)를 통한 새로운 음식 재료들   

  

콜럼버스의 교류(Columbian Exchange)는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1492년 항해에 뒤이어 유럽의 식민지화 및 무역과 관련하여 15세기와 16세기에 아메리카 대륙과 구세계 간에 식물, 동물, 문화, 인류, 기술 및 아이디어가 광범위하게 이전된 것을 말한다.

환경사적으로 콜럼버스의 교환은 의도하지 않게 옮겨진 생명체나 매독 같은 감염병도 포함한다. 무역로와 질병은 오랫동안 아시아와 유럽 사이에서만 이루어졌지만 신세계의 발견으로 질병이 없던 아메리컨 원주민에게 질병을 퍼뜨리는 역할을 했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현세대 이전에 새로운 질병에 관한 면역체계가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질병에 쉽게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유럽에서 유입된 생물과 병원균은 신대륙에서 생태계를 지배하며, 아메리카 대륙의 인류 80%가 사망하는 비극을 초래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들은 인수 공통 전염병을 일으키는 가축의 병원균과 수두와 장티푸스 등의 전염병에 의하여 흑사병의 창궐로 많은 인구가 쓰러져간 14세기 유럽을 재현하기도 한다.  

유럽에서 건너간 생물과 농작물들은 크게 번창한 것에 반해, 신대륙의 생물은 구대륙에서 극소수만이 자리 잡았다. 예외적으로 토마토, 감자, 옥수수 등 유럽인들이 신대륙에서 구대륙으로 가져간 작물은 18세기 유럽에서 매우 중요한 식량원이 되었다.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들여온 것들의 예로는 칠면조, 호박, 파인애플, 카카오, 콩, 바닐라, 옥수수, 토마토, 감자, 땅콩, 카사바, 피망, 고구마 등이 있고,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들여온 것은 양파, 올리브, 커피, 복숭아, 배, 꿀벌, 바나나, 사탕수수, 포도, 양, 돼지, 말, 곡물 등이 있다.

유럽은 아메리카 대륙에서 들여온 새로운 식물들 담배와 감자, 토마토, 옥수수, 설탕 그리고 초콜릿까지 일대 변혁을 맞이한다. 하지만 아메리카 대륙은 유럽의 토종 가축들이 들여온 균들에 의한 전염병과 새로운 질병들로 인하여 아메리카 원주민들의 인구수를 4분의 1로 급감시키는 대재앙을 일으킨다. 미국 역사학자 알프레드 크로스비(Alfred W. Crosby)는 1972년에 'The Columbian Exchange'를 출판하고 콜럼버스의 신세계 발견과 상륙이 환경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과 비극을 끌어냈는지 이야기해준다.     


'콜럼버스의 교류(Columbian Exchange)'는 농업의 변화와 가축의 순환(전염병)으로 세계의 역사를 순식간에 변화시켰다.     


오늘날 유럽의 식탁에 기본으로 올라오는 많은 식품은 사실 근대 초기 지리상의 발견 이전까지는 유럽인들은 전혀 모르는 것들이었다. 신세계에서 발견한 이국의 새로운 식품들이 유럽에 들어왔을 때 유럽에서 저항은 근세 초기 엘리트들과 대중사회가 지닌 보수주의의 결과였다. 사회적 관습의 혁신은 잠재적으로 기존의 사회질서를 위태롭게 만든다는 사고 때문이었다.

갈레노스의 체액설과 영양학은 근대 이전까지 의학의 유물론적 위대한 발전이 있기 전까지 유럽의 식단을 지배했다. 갈레노스의 체계 안에서 건강에 이롭다고 해석되거나 의학적 효능이 있다고 생각되는 식품들은 유럽의 식탁에 쉽게 수용되었다. 대표적인 것들은 신세계에서 온 칠면조와 커피, 차, 초콜릿등도 유럽 요리 범주에 빠르게 편입되었다. 감자 토마토 옥수수는 16세기에 유럽에 소개되었다. 그러나 신세계의 식품들은 유럽에 들어오자 만인의 환영을 받은 것은 아니었다. 감자와 토마토는 독성이 강하다고 인식되어 당시 영양학자들의 반감을 샀다. 이들 새로운 식재료들은 19세기에 들어서야 널리 소비되었다. 당시의 토마토에 대해서 존 힐(John hill)은 그의 정원 관리 안내서 에덴(eden)에서 ‘토마토를 먹는 사람은 거의 없으나 수프로 먹으면 괜찮다. 포르투갈과 유태인들은 이미 토마토를 잘 알고 있다’고 말했다. 토마토가 파스타나 토마토소스로 쓰이기 시작한 것은 1830년대에 들어와서야 유럽에서 흔히 쓰였다.

옥수수는 신세계에서 들어온 음식물 중 가장 빠르게 유럽 식단에 추가되었다. 옥수수는 16세기 초반 이베리아 반도, 남부 프랑스, 이탈리아 북부지역에서 재배되었다. 감자는 1550년대에 신세계에서 유럽으로 건너와 스페인과 이탈리아에서 수확했지만 인기가 없었다. 하지만 18세기에 와서 스웨덴과 독일 지역은 늘어나는 인구를 먹이기 위한 수단으로 감자 농사를 장려하기 시작했다.

콜럼버스의 교류의 혁신적인 소비 상품은 담배와 커피, 차 그리고 초콜릿으로 처음에는 약용 상품으로 소개되었다. 갈레노스의 의학이론을 공부한 의사들이 이 식품들을 합법적으로 장려하자 수십 년 만에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차 문화의 발달과 유럽의 도자 기술의 발전  

   

중국과 무역항로를 처음으로 개척한 포르투갈은 중국의 차(茶)를 접한 최초의 유럽인이었다.  중국차는 곧 프랑스와 독일, 영국의 부유층까지 빠르게 유행하게 된다. 중국의 차는 1662년 포르투갈 공주 캐더린이 영국 찰스 2세에게 시집을 가면서 영국에 소개된다.

17세기 후반, 중국에서만 생산되어 유럽으로 수출되는 홍차는 상류사회만이 소비하는 사치품이었으나 18세기에 들어 홍차의 인기는 서민들에게도 이어지고, 영국 식문화의 단조로움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영국의 습하고 추운 날씨에 따뜻함을 더해주었다. 수질이 좋지 않았던 영국인들에게 물을 끓여 만드는 홍차는 위생적인 환경을 보장해 주었다. 당시 영국의 일반가정에서는 홍차를 구매하는 비율이 총급여의 5%에 해당할 정도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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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수입된  청화백자와 홍차 잔, 티스푼 등 아기자기하고 보석 같은 도자기들과 시누아즈리(Chinoiserie)와 자포니즘(Japonism)이라는 새로운 유행과 함께 이국적인 차문화를 만들고 중국 차는 홍차로 불리며 영국 귀족 주부들 사이에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시작한다.

1600년대 영국이 설립한 동인도회사는 중국으로부터 도자기를 수입하고, 네덜란드는 일본 나가사키(長崎) 항으로부터 일본의 도자기를 수입했다. 중국의 청화백자와 일본 도자기를 본 유럽의 상류층은 동양의 아름다움과 우아함을 느끼며 그들의 중요한 수집품이 되었다.

시누아즈리라는 중국 도자기의 유입은 도자기 불모지의 유럽에 도자 시장을 만들어내고, 자포니즘은 우끼요에로 대표되는 일본 문화로 반 고흐와 모네 등 인상파 화가들에게도 영향을 끼쳤다. 그렇게 전해진 차는 영국에서 애프터 눈 티(afternoon tea)라는 차문화의 꽃을 피웠다.

홍차는 음료로서의 기능뿐만이 아닌 동양의 신비로움을 전했을 뿐 아니라,  중국식 도자 문화와 일본의 정원 문화 등 당시로서는 유럽인들에게는 생소하고 고급문화로 여겼던 아시아의 문화를 유럽 귀족문화로 침투시키는 계기로 작용했다.

중국 도자기를 수입만 하던 유럽은 독자적으로 유럽의 세련되고 단단한 도자기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독일의 드레스덴의 작은 마을인 마이센(Meissen)에서 1709년 유럽 최초로 1400도 이상의 고온에서 구워내는 하드 페이스트(Hard paste) 도자기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다.

네덜란드는 유럽의 도자기 생산 공장의 역할을 하였으나 중국의 청화백자가 대량으로 수입돼 네덜란드 도자기산업은 침체 일로에 있었다. 독일 마이센의 성공을 목격한 네덜란드의 도공들도 이에 자극을 받아 유약에 관한 연구를 거듭해 청화와 흡사한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는데 이것이 델프트 블루(Delft Blue, 델프트 청화 백자)로 불리는 네덜란드 도자기들이다. 델프트 웨어는 접시, 화병 및 기타 장식적인 형태의 접시들과 도자기를 칭하는데, 17~18세기에 네덜란드가 유럽 전역에 수출하는 주요 산업이었다. 또한 유럽의 도자기들은 동양으로부터의 단편적 카피에 그쳤던 것을 뛰어넘어, 도자 문화에 금빛과 다양한 유럽의 색을 입혔다.

르네상스 이후, 로코코 양식의 화려한 장식을 더하여 중국과 일본의 자기를 넘어서는 유럽만의 도자기들을 만들었고 질그릇과 금속소재의 유럽 상류층의 식탁을 빛나는 본차이나 도자기로 장식된 식탁으로 탈바꿈시킨다.




디저트의 발전과 비극적 노예무역

 

기원전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인도를 점령하면서 '벌이 없는 꿀'이라고 칭한 설탕도 발견한다. 적도 지방에 위치한 인도는 사탕수수(suger cane)의 원산지로 설탕물을 추출하고 정제하여 설탕 만드는 최초의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이후 인도의 결정화된 설탕은 유럽으로 유입되어 의료용 약품으로 쓰이거나 중세와 르네상스 시절 유럽의 식탁에서 고귀한 향신료의 역할을 한다. 설탕 제조의 비밀은 7세기경에 아랍이 번성하면서 아랍 문화로 흡수되었다. 사탕수수의 재배는 이슬람의 우미야 왕조의 번성과 함께 북아프리카와 이베리아 반도까지 넓혀져 사탕수수를  생산하게 된다. 이후 11세기 십자군 전쟁으로 인하여 설탕은 아랍문화권에서 유럽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사탕수수에서 추출된 수액을 고열로 정제하여 고체 형태로 가공된 설탕은 고가의 가격으로 유통되며 '돌 꿀(stone honey)' 또는 기분이 좋아지는 '기적의 마약'으로 불리며 중세와 르네상스 시절 유럽의 상류사회에 의료용과 향신료의 역할을 하며 거래되기 시작했다. 설탕은 중세 이후 유럽 요리의 한 부분이었고, 후추와 함께 최고의 향신료로서의 자리를 지켰다. 중세와 르네상스 시절의 귀족의 식탁에 설탕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은 없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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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항해 시대에 포르투갈은 서아프리카인 현대의 세네갈과 코트 디부아르, 가나 지역을 탐험하고 사탕수수를 재배하기 적합한 적도 지역을 찾아냈다.이것은 서아프리카 흑인들에게는 비극의 서막과도 같은 사건이었다. 노예무역의 서막은 1444년 포르투갈이 서아프리카에서 스페인 세비야까지 235명의 서 아프리카인을 생포하여 노예로 팔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탕수수 농장의 발견도 중요했지만, 유럽열강은 사탕수수를 재배하는데 필요한 엄청난 노동을 견딜 수 있는 건장한 노동자를 필요로 했다.  이후 1452년, 교황 니콜라스 5세는 교황 칙서 '둠 디베르사스'(Dum Diversas)를 선포하여 기독교인이 아닌 사람들을 노예로 삼을 수 있는 법을 선포한다. 하나님이 무언지도 모르는 흑인들에게 노예를 합법화하는 인류 최대의 악법으로 유럽의 모든 국가는 노예무역에 가담한다. 신세계의 대규모 농장을 지원하는 데 필요한 노예시장과 노예무역은 이후 근대에 노예해방 운동이 이루어지기까지 400년을 이어졌다.

스페인은 중남미 아메리카 대륙에서 설탕을 재배하기 시작하지만, 설탕을 재배하기에는 남아메리카의 '원주민'이 적합하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의 제러미 다이아몬드의 지적대로 유럽에서 온 천연두 등의 전염병으로 남아메리카 인구 대부분이 멸종하다시피 하고, 유럽인들에겐 설탕 농장에서 노동을 할 노예들이 필요로 했기에 대서양 노예무역은 식민지 대규모 설탕 플랜테이션은 유럽인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가져다줄 최고의 상품이 되었다. 17세기 영국과 프랑스, 네덜란드 등이 노예화된 식민지에 대규모 설탕 플랜테이션을 개발하면서 유례없는 규모의 설탕을 생산하게 되었다. 이후 18세기에는 설탕 소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이를 공급하기 위해 더 많은 설탕 생산 플랜테이션이 공급되었다. 설탕은 귀족사회의 달콤하고 우아한 맛을 내는 향신료에서 일상적인 서민들도 소비하는 감미료로 변화되었다. 그리고 설탕의 증가는 메인 코스에 먹던 달고 짠 음식의 맛의 분리를 분리하였다. 중세와 르네상스는 현대의 서양요리와는 달리 단맛과 짠맛이 섞여 있는 문화였다. 하지만 17세기 프랑스에서 시작된 새로운 요리 관습인 오트 퀴진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서 향신료와 설탕을 듬뿍 넣은 요리 대신 음식의 본질적인 맛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본질적인 맛을 추구하기 시작하자 메인 디쉬에서 향신료와 설탕이 배제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단맛을 추구하는 인간의 욕망은 자연스럽게 설탕을 음식의 후반부로 집중하게 만들고 ‘디저트’로 탄생하게 되었다.

디저트(dessert)는 '식탁을 치우다'라는 프랑스어 단어 'desservir에서 유래된다. 유럽 상류사회의 식사 후에 과일이나 치즈를 먹는 관습에서 서서히 디저트를 먹는 관습이 대중화되었다. 디저트의 발전은 새로운 요리기술들을 이끌어냈다. 제과 요리사들은 새로운 직업으로 사탕과자를 만들어냈다. 이후 제과기술은 발전하기 시작하고 로코코 양식의 과도한 장식은 제과기술에도 영향을 주어 설탕공예의 절정으로 발전하며 디저트의 발전을 이끌었다.

프랑스에서의 설탕으로 인한 경제적 호황은 아프리칸 흑인들에게는 역사상 최고의 비극이 되고만다. 자연스럽게 형성된 노예시장에서 노예무역을 하는 사람들은 경제 사상가들과 경제 학자였으며, 불굴의 의지로 대항해에 도전하는 위대한 선장 불리는 사람들과 카톨릭의 존경받는 사제들과 교황이었다. 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농장의 노예들의 비극과 프랑스 파티시에의 열정이 만들어낸 단어가 '디저트'였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연회와 축제    

 

루이 14세는 프랑스 왕국 부르봉 왕조의 3대 왕으로 1638년 4살 때부터 왕에 즉위하고 1715년까지 72년 동안 유럽의 최강대국 프랑스를 통치하며 태양왕(Le Roi Soleil)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하다. 그리스 신화의 태양신인 아폴로를 표방하고, 163cm의 작은 키에도 불구하고 항상 다리 근육에 자신이 있어 타이트한 스타킹을 입고 다녔다. 대항해 시대  해상무역과 신세계로부터의 자본의 수탈을 바탕으로 유럽의 왕실들은 왕의 권위야말로 절대적인 것임을 보여주기 위해 새로운 궁전을 짓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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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13세의 사냥용 별장을 24년 동안 36,000명의 인부와 6,000마리의 말을 동원해서 건설한 베르사이유 궁전은 로마제국 이후에 가장 사치스럽게 미술과 조각 기술을 공들인 궁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궁전 어디에나 아폴로의 상징인 태양이 장식된 천정과 큰 문이 있어서 베르사이유의 소유주가 누구인지를 알려주었다. 또한 밤에는 수많은 양초가 유리 샹들리에와 은제 촛대 위에서 타올랐고 벽에는 라파엘로, 루벤스의 큰 그림이 걸렸고 루이 14세의 침실에는 모나리자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자랑은 사치스러운 궁전만큼이나 뛰어난 정원이었다. 루이 13세의 넓은 사냥터인 숲을 배경으로 길과 도로를 내고, 거대한 연못, 분수와 폭포, 극장과 테라스를 조화와 대비, 균형감을 맞추어 누가 보아도 아름다운 느낌을 받도록 세심하게 설계되었다.  

1664년 5월 베르사이유 궁전은 ‘마법의 섬에서 맞는 즐거움’이란 이름으로 내건 잔치로 낙성식을 가졌다. 엑스 랴샤벨 조약을  기념한 이 연회는 표면상으로는 왕비에게 헌정되었지만 실제 주인공은 왕의 새 정부인 ‘루이즈 드 라 발리에르’였다. 즐거운 잔치는 보름 동안이나 계속되며 회전목마와 무용극, 불꽃놀이가 이어졌고, 몰리에르의 극 공연도 있었다.

거대한 베르사이유 궁전이 완공되고 루이는 지방의 호족에 속하는 귀족들을 불러들였다. 전제군주의 부름에 귀족들은 베르사이유에서 자신의 영지를 보호하기 위해 루이에게 복종을 맹세한다. 지방의 영지에서 소군주였던 그들이 베르사이유 궁전에 오면 방 하나를 받고 지내며 불편한 생활을 하지만 베르사이유는 그 시대 최고의 사교의 장과 최고위 상류층 고급문화의 경험을 만들어 주어 모든 귀족들이 베르사이유 입성을 축복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루이 13세와 함께 할 수 있는 문화를 가진 이너 서클(Inner Circle)이 형성되어 당시 최고의 문화생활을 하며 왕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고, 호족의 영지와 권력을 부여받았다.

베르사이유에서는 매일 저녁 음악, 춤과 행운이 오가는 도박판이 벌어졌고, 매주 토요일 저녁에는 연회가 열렸다.  또한, 베르사이유 궁전에서의 연회는 유럽 전체에 프랑스 왕실의 문화적 우월성과 풍요로움을 각인시켜 주기 위해서였다. 가장무도회가 종종 열렸는데 궁전의 모든 사람이 로마, 페르시아, 투르크, 인도 복장을 하고 3일 동안의 축제를 즐겼고, 자연스럽게 성에 대한 문화도 개방되었다.     

베르사이유 궁전의 루이 13세의 식사 의례는 장엄함 그 자체였다. 식사의 시작은 의전관이 ‘여러분 폐하의 만찬을 준비하십시오! 하고 외치면서 친위병실의 문을 두드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친위대 장교와 의전관 두 명이 왕실의 식탁을 차리는데 필요한 식사용 식기와 테이블용품들을 든 행렬이 이어졌다. 행렬이 지나갈 때마다 모두가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했다. 왕의 식탁을 위해 전실에 두 개의 식탁이 준비되었다. 하나는 좀 작은 크기로 손을 씻기 위한 물병과 작은대야, 와인병과 물병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큰 식탁에서는 빵을 자르기도 하고 요리들이 안으로 들이기 전에 마무리 손질을 하는 식탁이었다. 왕비가 함께 만찬을 할 때는 이런 식탁의 수가 왕과 왕비 각각을 위해 두 배로 늘었다. 친위병실 정돈이 끝나면 이웃한 전실에 왕의 식탁을 차렸는데 실제 식탁은 상당히 작은 편이었다. 식탁은 중세처럼 벽난로를 등지고 앉을 수 있도록 놓았다. 의전관과 시종, 파느트리(식품 관리소)의 책임자가 식탁보를 펴고, 그 후에 시종 두 명이 음식을 날라다 놓았다.

루이 14세의 식탐은 대단하여 4종류의 수프와 꿩 2마리, 큰 샐러드 한 접시, 두꺼운 햄 2조각, 마늘소스 양념된 양고기 한 접시, 페스트리 한 접시와 마지막으로 과일과 삶은 달걀 먹었다고 기록되어있다. 베르사이유에서는 루이 14세가 포크를 사용하면 남자답지 못하다는 이유로 칼과 손으로만 식사를 하였다. 유럽에서 포크의 사용이 늦어진 이유가 루이 14세의 포크를 싫어한 연유도 있다.  

루이 14세는 베르사이유 궁전에서 성대한 축제를 벌였고, 그 과정을 세밀한 판화로 멋진 그림책을 만들어 유럽 전체에 알렸고, 프랑스의 궁정의 음식문화도 유럽으로 스며들었다. 유럽 대륙의 다른 군주들은, 심지어 프랑스와 전쟁 중이던 나라까지도 베르사이유를 모방한 궁전을 지었고 프랑스의 음식 문화 또한 자연스럽게 전 유럽의 궁전과 귀족들의 식탁으로 펼쳐져 갔다.




요리 기술서 ‘프랑스 요리사(Le cuisinier francois)’ 출간    

 

루이 14세의 시절 프랑수아 피에르(필명 라 바렌, La varenn)는 1651년 음식을 만드는 방법과 기술에 방점을 둔 ‘프랑스 요리사(Le cuisinier francois)를 출간한다. 고대와 르네상스 시절까지 앞장에서 논의된 플라티나의 책에서까지는 음식에 관한 영양학적 의학적 충고에 관한 책이었다면 라 바렌의 ’ 프랑스 요리사‘는 본격적인 조리서였다. 음식을 맛있게 만드는 방식과 조리법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라 바렌의 프랑스 요리사는 유럽에서 새롭고 대중적인 스타일 요리서의 효시로 평가받는다.



이 도서는 요리책으로는 처음으로 전적으로 요리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최초의 요리서였는데, 정교한 그림과 조리법을 예시로 들어 이를 바탕으로 한 프랑스 고전 음식인 오트 퀴진을 탄생으로 이끈다. 프랑수와 피에르는 아랍 요리와 같은 다량의 향신료를 배제하고, 버터와 크림 같은 지방 성분을 사용하여 현대의 프랑스식 조리법으로 오트 퀴진이라 명명된 새로운 요리 유행을 만들어낸다.

프랑수와 피에르, 필명 라 바렌 요리의 핵심은 소스였다. 소스에 관한 정리된 독립된 장을 책에 마련하지 않았지만, 소스는 전반적으로 모든 요리법 안에 포함되었다. 프랑스 요리사의 첫 장의 레시피는 스톡을 만드는 법으로 이후 현대의 대부분 서양요리서 역시 스톡을 만드는 법이 첫 장에 등장한다. 그는 책에서 모든 요리사들은 ’ 오뜨 구(Haut gout, 최고의 맛)‘를 열망하는 마음을 품어야 한다고 강조하며 소스는 향신료를 물리치고 유럽 요리의 중심요소로 등장시킨다. 라 바렌의 새로운 요리 용어와 단순하고 절제 있는 조리법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고, 현대 프랑스 요리를 서양조리의 표준으로 만들었다.  

초판이 나온 후 75년 동안 총 30판이 발행되어 후세의 많은 요리사들이 이 책의 영향을 받아 프랑스 요리가 곧 유럽 지배계층의 음식이라는 영향력과 함께 프랑스어를 요리에 관한 공용 언어로 정립시켰다.


라 바렌의 프랑스 요리사 이후, 태양왕 루이 14세부터 프랑스 대혁명으로 막을 내린 루이 16세까지의 프랑스 요리는 엄청난 발전을 이룩한다. 이때를 프랑스 음식문화의 대변혁기라 칭하는데, 라 바렌이 막을 연 프랑스의 요리는 '오트 퀴진(Haute Cuisine, High cooking)'이라 불리는 왕족과 귀족들을 위한 요리들이 발전한다. 이 시기 대략 100년의 역사에서 프랑스 음식문화 발전의 가속이 너무도 빨라, 루이 14세는 루이 16세가 먹었던 음식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르네상스 시대의 플라티나는 음식의 도덕에 대한 전환을 이루었다면 라 바렌은 진정한 조리기술과 직업인으로서의 요리에 관한 전환을 이루었다.

라 바렌은 르네상스 이후 라틴어가 힘을 잃어가고 프랑스어가 유럽인의 공용 언어로 발전해 나아갈 즈음 책을 출판하여 훨씬 더 많은 독자와 요리기술에 관한 지식을 문자로 퍼트릴 수 있었다. 또한, 17세기 후반 요리가 기술적인 부분만이 소요되는 단순 노동을 의미하지 않고 지배층의 지적능력과 취향이 필요한 것이라 인식되기 시작한 시점이기도 했다. 라 바렌의 프랑스 요리사 이후 유럽인들은 요리하는 방법과 먹는 법에 대한 진지한 방법을 생각하게 되었고, 19세기에 미식법과 더불어 요리를 고귀한 직업과 문학의 영역으로 발전시키는 출발점에 이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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