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의 붕괴와 신학의 시작
근대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저서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문명은 '발생→성장→쇠퇴→해체'의 과정에 공통된 역사 법칙성을 구성하는 문명 사관을 전개한다.
문명의 흥망성쇠는 로마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는 과정이었고, 거침없던 로마의 성장기가 지나고 로마는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로마제국의 영토확장이 지중해의 마지막까지 한계에 다다랐다. 제국의 성장이 멈추고, 군대는 전리품을 공급할 수 없게 되어 군인들의 급여를 책임질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경제는 정복과 정복지 노예의 노동에 기반한 경제구조로 더 이상의 정복지가 없게 되자 로마는 한계에 부딪혔다. 중앙정부는 재정적자 상태로 돌아서자 세금을 추가 징수하였고 여론 또한 급격히 나빠졌다.
기독교 신도가 늘어나자 로마는 기독교를 인정하고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로마시대의 기독교는 로마의 시민정신을 무너뜨리고 오직 하느님의 본성과 종교적 믿음에 관한 학문, '신학'이라는 하나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대의 유럽인들은 절대 인정하지는 않지만, 유럽의 종교인 기독교는 중세시대에는 이슬람에게 완패했다.
지중해에서 로마의 몰락으로 농업생산이 지속적으로 떨어지자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화폐를 매개로 거래하는 시장경제가 위기에 처하면서 도시는 문화적 우월성을 잃어버렸다. 지중해 전역의 도시를 연결해주던 문화와 교역의 네트워크가 시들해지자 로마의 귀족계층은 시골에 틀어박혀 소유지의 생산물에 기대어 생활했다. 로마의 붕괴 이후, 서유럽은 교역활동의 중심인 지중해를 사라센에게 빼앗김으로써 교환경제의 축복의 위치에서 자연 경제로 후퇴하는 결과를 맞았다.
교회와 교황은 중세 초기를 암흑의 시기로 빠트렸지만, 그리스 로마시대 이후로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률이 높은 중세의 유럽인들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삶을 이어갔다.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기독교의 탐식은 죄라는 덕목 때문에 고급 요리문화는 사라졌고, 로마의 요리 관습은 후세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져 버렸다. 요리뿐만이 아니고 전 사회적으로 많은 로마의 문화와 문명의 기술들이 이어지질 못했다.
중세 초기 카를 대제가 서유럽(프랑크왕국)을 게르만족의 대 이동과 이슬람 세력확장으로부터 간신히 방어해내며 유럽의 부활을 꿈꾸었지만, 카를 대제의 사후에는 프랑크왕국도 분열되어 동프랑크(독일), 서프랑크(프랑스), 이탈리아 등 3국이 성립되며 각 지역별 문화를 이어갔다. 한편 영국에서도 색슨계의 통일 왕조가 성립되었고 유럽은 통일된 유럽이 아닌 각 지역별 고유의 기독교 문화를 만들고, 국가를 성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등자의 개발과 십자군 전쟁
서시 622년 무함마드는 아라비아에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무슬림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다. 무슬림들은 초기 로마제국이 성장과 맞먹는 경이적인 속도로 지중해를 잠식했다. 아라비아 반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지방 대부분과 로마를 제외한 시실리를 포함한 그리스 지역을 포함한 지중해 남부연안을 점령했다. 지중해는 곧 이슬람 제국이었다.
이슬람 제국이 팽창하고, 기독교 내부에서는 동로마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다른 입장 차이를 보이며 성상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이슬람의 문명과 기술은 유럽 전역에 전파되고 훗날에 스페인의 레콘키스타 운동으로 스페인을 유럽인들이 차지할 때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랍의 범선 기술이 스페인에 전수되어 스페인의 대항해 시대를 여는 기술의 서막이 된다. 12세기 이후의 중세 중기에는 국제무역과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인하여 유럽은 중세 도시국가 형태로 성장한다.
유럽의 등자와 마상시합 전투 장면
로마시대까지는 말을 이용한 마차가 탈것이라면, 중세부터는 안장을 갖춘 말을 직접 타는 승마의 시대로 변화했다. 안장 없이 말을 타던 전 시대와는 달리 안장을 갖춘 말로써 비로소 실용적 승마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서기 8세기에 등자가 유럽에 유입되었다. 등자는 말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로 등자는 말에 오르고, 말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간단하고 편리한 도구이지만 말을 마차로 이용한 로마시대에는 발명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서기 2~3세기부터 사용되었지만 유럽에서는 8세기에 들어서야 사용되었다. 등자가 추가되면서 말을 타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기사 계급이 활성화되었고, 유럽 각지의 기사단들은 교황청의 주도 아래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유럽의 등자 도입은 기병 육성과 전투력 향상해, 기병은 전투의 주력이 되었고 기사 계급과 봉건주의 출현에 공헌했다.
이렇듯 등자의 유입은 중세 유럽에서 기사들이 활약 가능하게끔 하는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었다.
중세의 십자군 원정은 소요기간이 굉장히 길고 전쟁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교황청에서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기사들의 재산을 신의 이름으로 위탁받았다. 실제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많은 기사들이 돌아오지 못했고 영지를 위탁받은 교황청은 영지관리 시스템을 운용하였고, 교황청은 이로 인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신형 쟁기와 장원의 발달
“기술사에 대한 이해가 심화됨에 따라 어떤 새로운 장치는 단지 문을 열 뿐 사람들을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어떤 발명품이 수용되느냐 거부되느냐, 그리고 수용될 경우 어느 정도 그 발명의 잠재력이 실현되느냐 하는 것을 그 발명품 자체의 성격 못지않게 어떤 사회의 상황과 지도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중세의 기술과 사회 변화’_ 린 화이트 주니어
During the ninth and tenth centuries, new agricultural techniques (the moldboard plow)
린 화이트 주니어는 그의 저서 ‘중세의 기술과 사회 변화’에서 등자와 쟁기가 바꾼 유럽 역사를 다루었다. 말에 더 밀착할 수 있는 말 받침대인 등자는 기사의 생산으로 봉건제도를 촉발시켰고, 쟁기의 개발을 통해 유럽의 농업 한계선이 보다 북방까지 상승하여 삼포식 농업(The three-field system)이 가능해지면서 비로소 봉건사회가 완성되었다고 설명한다.
남부 유럽의 토양은 느슨하고 모래가 많고 건조한 토양으로 나무 소재의 쟁기로도 경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은 고대부터 중세 초기까지 도시의 성장과 제국의 번영은 남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가벼운 유형의 쟁기는 북유럽의 무겁고 점토질이 많은 토양을 쟁기질하는 데는 좋지 않았다. 철제로 만들어진 튼튼한 신형 쟁기가 발명되어 북유럽에 유입되었다.
중세 북유럽의 무거운 점토 토양을 뒤집을 수 있는 신형 쟁기가 발명되자 유럽의 농경사회는 변화의 바람을 맞아다. 작은 기술 도약으로 인해 유럽의 부의 분배가 북유럽에도 축복의 바람을 불어주었다. 신형 쟁기의 발명으로 점토 토양이 있는 지역을 이용할 수 있었고, 이 무거운 점토 토양은 남유럽의 가벼운 토양 유형보다 비옥해졌다.
이러한 농업 혁명은 중세의 북유럽에까지 번영을 가져왔고 북유럽의 경제 성장과 도시의 성장에 기여했다.
유럽에 비해 더 영양질이 높은 비옥한 농토로 변화하여 수확량이 남부 유럽보다 더 좋은 기적을 낳았다. 중세의 새로운 쟁기에 의한 농업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잉여 농산물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전 유럽에 새로운 대도시가 탄생하는 사회 변화가 가능케 했다.
북유럽은 신형 쟁기로 인하여 농업 혁명이 일어났으며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수확량과 더 효율적인 운영이 이루어지고 유럽의 경제 성장 센터가 유럽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Europe in the Middle Ages - Technology of The three-field system
삼포식 농업(The three-field system)은 중세와 근대까지 유럽에서 사용된 작물의 순환 체제이다. 농지를 3개의 큰 들판으로 삼등분하여 동일한 계절에 서로 다른 유형의 작물을 재배하는 농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들판은 가을에 겨울 밀이나 호밀을 심고 두 번째 들판에는 완두콩, 렌즈콩 등의 콩과의 작물을 심는다. 세 번째는 들판은 휴경지로 남겨 놓는다.
이렇게 삼포식 농업으로 농작물을 경작할 경우 첫 번째 필드의 밀은 질소의 토양을 고갈시키지만, 두 번째 필드의 콩과 식물은 질소를 고정시켜 토양을 비옥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필드인 휴경지는 곧 잡초로 자라서 농장 동물을 방목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휴경지는 가축의 배설물로 지력을 회복하여 토양 환경이 좋아지는 효과도 나타났다. 농작물들은 순환되어 심어지게 되어 하나의 들판에서 경작되는 순환주기는 3년에 2번을 수확할 수 있었다. 농사를 짓고 휴경이 필요 없는 삼포식 농업은 북유럽 농민들이 더 많은 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중세에는 가축의 발굽도 개발되어 황소가 아닌 말도 경작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튼튼한 쟁기의 등장과 삼포제의 병렬적인 발전은 농업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농작물 판매와 무역이 가능했던 중세의 경제는 삼포제 농업으로 말미암아 영주들에게 상당한 잉여와 경제 번영을 가져다주었고, 삼포식 농법은 근대 산업혁명 시대에 화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질소 비료를 생산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의 계급
중세 유럽은 왕-영주-기사-농노 순의 계급사회와 로마의 라티푼티움(대농장) 제도를 계승하여 ‘장원’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산업체계를 갖추었다.
장원 제도가 도입되면서 영주들이 식량의 생산과 가공을 통제하면서 농민들에게 잉여생산물을 수탈할 수 있는 구조로 고착되어 갔다. 농업 생산성이 낮은 착취당하는 농민들에게 중세의 기아 현상과 굶주림은 삶의 고정적 요소로 나타났다.
15세기 초반,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에는 중세 유럽의 고급 식사 장면을 보여주는 삽화가 있다.
그리고, 정원은 상류 귀족층에게 관심의 대상이자 막대한 투자 대상이었다. 실질적인 채소작물의 식품 공급원이었고, 원예는 귀족들의 권위와 품격을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다. 중세에도 특정식물에 관해서는 교역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일례로 프랑스가 양배추를 영국에 수출하는 문헌도 남아 있다.
계급의 사다리에서 상부를 차지하는 귀족의 빵은 희고 부드러웠으나, 사다리를 내려 갈수록 빵은 거칠고 색은 어두워졌다. 계급의 사다리에 마지막 부분의 계층은 그나마 거칠고 검은 빵도 아닌 ‘죽’을 먹었다. 기근이 일어날 경우는 돼지의 사료였던 도토리와 너도 밤나무의 열매를 대체하여 구황작물로 보충했다. 중세 유럽의 일인당 빵 소비량은 1~1.5kg으로 추정된다.
빵은 중세 식생활의 중심이 되었고, 제빵사는 중세 유럽에서는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제빵사들은 길드를 조직하고 빵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법률과 규정을 만들어 통제하였다. 장원 내에서 무게를 속이거나 값이 싼 밀가루로 반죽을 하여 만든 질 낮은 빵의 가격을 비싸게 받는 제빵사들은 심각한 범죄로 간주되었다. 빵의 무게나 가격을 속인 제빵사는 빵 한 덩어리를 목 주위에 묶어 썰매를 타고 장원 지역을 끌고 다니면서 처벌을 받았다.
'금욕적인 식탁'과 '풍요로운 식탁'
로마 붕괴 이후 5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1000년의 중세 식문화 규범을 단순하게 정리하기는 힘들다. 다양한 유럽 지방의 음식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식습관과 요리방법이 도입되었으며 현대 유럽 요리의 기초를 놓았다. 밀은 통치계급을 위한 곡물이었고,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은 귀리와 보리, 호밀 등으로 빵과 죽, 파스타로 소비되었다.
중세의 기독교는 영적 이로움을 위하여 육류와 유제품을 멀리하게 하는 금육을 장려했다. 사순절 기간(에수 그리스도 부활 전 40일간의 기간)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토요일등을 금육의 날로 삼았다. 육신의 욕망에 관한 모든 것들 색욕이나 탐식 등을 멀리하면 영혼의 구원을 보장해 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Limbourg brother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
하지만 유럽의 상류층의 식습관은 엄청난 양의 육류를 소비하고, 겨울에도 먹을 수 있도록 저장했다. 중세에는 신선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신분의 상징이었다.
돼지고기와 사냥을 좋아하는 상류층의 입맛도 계속 이어졌다. 돼지고기는 로마 시절 이후로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육류였다. 양은 양모를 얻을 수 있어 잡지 않고 키웠고, 돼지는 그런 생산품이 없었기 때문에 식용으로 알맞은 크기가 되면 바로 도살했다. 돼지고기는 저장용으로 인기가 많아 도토리와 너도밤나무 열매를 먹여 살을 찌운 후, 대개는 늦가을에 도살했다. 너도 밤나무의 열매는 밤과 비슷하지만 떫어서 먹을 수 없는 밤으로 유럽 산림에 많이 자생한다. 특히 북유럽에 속하는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산림의 20%가 너도밤나무로 조성돼있다.
중세 프랑스의 레시피에는 쇠고기가 거의 없고, 대신 돼지고기와 가금류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고기는 어릴수록 최상의 품질이라고 생각했다. 상류계층의 식탁에 오르는 사냥감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특별구역이 지정되기도 했다. 지배계급의 사냥은 자기가 소유한 땅에서 자라나는 자연을 지배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가금류는 사냥의 형태로 귀족의 식탁에 올랐으나, 소고기는 중세에는 일반적인 육류는 아니었다. 소는 목초를 먹고 자랐기 때문에 겨울을 제외한 계절은 먹이를 구하기 쉬웠지만 목초가 없어지는 겨울에는 많은 수의 소를 키우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건초와 사일러지를 만드는 기술이 근대에 발전해서야 소고기는 식탁에 오를 수 있는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북유럽에서는 바이킹 시대부터 대구와 청어 같은 생선의 소비가 압도적이었다. 말을 타면 하루 만에 바다에 도달할 수 있는 북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신선한 바다 생선을 소비했다. 하지만 중부 유럽의 상류층에게 신선한 생선의 소비는 사회적 신분의 과시와도 같았다. 신선한 생선을 먹기 위해 양어지를 만들고, 신선한 생선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도 이루어졌다.
4 원소설과 중세의 의학
Medieval-Middle-Ages-Health-Medicine-Disease
중세의 의사들은 그리스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 4 원소설을 받아들였다.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는 4 원소(흙, 물 , 공기, 불)는 각 개인이 지닌 고유한 체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다. ‘흙은 건조하고 차며, 물은 차고 습하고, 공기는 습하고 뜨거우며, 불은 건조하고 뜨겁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다. 식재료 또한 이와 같아 음식에도 이를 적용시켰다. 중세의 의사들은 대립된 성질의 음식을 섞어먹어야만 건강에 좋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땅속에서 자라는 구근 채소들은 건조하고 차다고 생각했으며, 물속에서 사는 생선은 차고 습한 성질을 가지며, 뜨거운 태양 아래 건조되어 만들어지는 백포도주는 공기와 불의 성질을 지닌 건조하고 뜨거운 성질을 지닌다고 생각했다.(적포도주는 백포도주에 비해 건조도가 낮다고 생각했다.) 불로 조리된 음식은 건조하고 뜨거운 성격의 음식이라고 규정을 지었다. 현대의 요리에서 생선(차고 습한 성질)을 백포도주(건조하고 뜨거운 성질)와 먹는 관습은 고대의 의학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따뜻한 음식과 찬 음식의 조화, 예를 들어 오븐에서 익힌 구이 요리와 물에 끓여 식힌 음식인 찬요리들의 조화는 연회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이 이론은 근대의 주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시대에도 전해져 현대 유럽의 상업적 주방을 뜨거운 요리 주방(hot production kitchen)과 차가운 요리 주방(cold production)을 나누게 된다.
현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의학의 사상체질이나 음양오행에 따른 식습관에 대한 믿음과 비슷하다.
과일은 유럽 전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품으로 소비되었다. 특히 하늘과 가까울수록 신성시되는 당시의 기독교의 철학에 따라 양파와 대파 등의 구근 채소는 하류층이 소비하는 식품이었고, 나무 높이 달린 과일류는 전 유럽인이 좋아하는 식품이었다. 포도는 프랑스에서 재배되어 식용으로 소비되고 건포도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보관성이 좋지 않은 대부분의 포도는 포도주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시트러스류의 쓴 오렌지(당도가 좋은 현대의 오렌지는 근대에 개량하여 개발되었다.)와 레몬은 남부 유럽에서 재배되어 유럽의 상류층에게 공급되었다. 사과, 복숭아, 무화과, 체리 등도 재배되어 누구나 좋아하는 식품이 되었다. 과일 먹는다는 것은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되어 병약자들이 자주 먹었다.
설탕과 꿀은 모두 비쌌기 때문에 단맛을 요구하는 요리에는 많은 종류의 과일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조리법이었다.
중세 음식의 특징을 규범 하는 향신료
식품의 장거리 거래는 식품의 보존기술과 희귀성 때문에 이국적인 향신료와 수입품은 가격이 매우 비쌌다.
중세 요리의 특성은 바로 향신료의 강한 맛을 추구했다. 단순히 향이나 소화 효능 때문이 아니라, 음식의 빛깔을 입히기 위해 사용되었다. 요리책에 기록된 레시피의 70퍼센트 이상이 향신료를 사용하였으며, 이것은 상류층 요리의 특성이었다. 이런 향신료는 무역을 통하여 유럽과 아라비아를 거쳐 인도와 중국에까지 먹거리의 문화를 교류하는 교역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중세의 유럽 요리에서 향신료의 역할은 음식의 색과 향을 바꾸고, 중세 의학적 측면에서 건강한 음식을 만드는 방편이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비싼 향신료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특히 계피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동양의 향신료 중에서 가장 비싼 편에 속했다. 계피의 달콤한 향은 순결한 미덕을 연상시켜, 성모 마리아의 수식구로 사용되며 여러 식품과 비싼 화장품 식재료로 쓰였다.
소금은 역시 중세 세대에도 여전히 값비싼 상품이었다. 식량이 떨어질 겨울을 대비하여 식품을 보존하는데 쓰이는 귀중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품보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건조였다. 특히 남유럽지역은 강우량이 적은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곡물에서부터 과일, 육류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의 태양과 바람을 이용하였다. 음식의 건조는 부패를 유발하는 미생물의 활동을 줄임으로 보존성을 크게 연장했다. 염장과 훈연, 발효와 같은 방법을 병행하여 건조된 식품들은 새로운 맛으로 탄생했고, 식품의 보존을 더욱 연장할 수 있었다.
중세 시대에 후추는 냉장고가 탄생하기 이전 도살된 고기의 보관이 어려웠던 시절의 썩은 고기의 맛을 감추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믿어진다. 하지만 그 주장은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된다. 황금만큼 비싼 후추로 고기의 악취를 가리는 것보다 새로운 가축을 구매하여 도살하여 신선한 고기를 얻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세에도 부패한 음식을 섭취하면 몸이 아픈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도 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좋아했고, 또한 향신료를 첨가하여 조리된 음식으로 본인의 권위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무역 독점으로 인한 중세시대의 후추의 엄청난 가격은 포르투갈이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찾도록 유도한 이유였다. 이후 후추는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하층계급들까지 사용하며 흔한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후추는 일상적인 양념으로 세계 향신료 거래의 5 분의 1을 차지한다.
유럽 최대의 재앙 흑사병은 치즈의 발달을 촉진하다.
14세기 초 중세 후반의 유럽 인구가 증가하여 최절정에 이르면서 1인당 이용할 수 있는 고기와 유제품의 양도 점차 줄어들었고, 점점 더 곡류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구의 최절정기 직후, 1348년부터 1349년까지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최소 7500만, 최고 2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재앙과 같은 흑사병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의 식탁은 육류가 넘쳐나는 축복을 받았다. 유럽에서는 줄어든 인구에 비해 1인당 이용 가능한 동물 개체수가 상대적으로 높아져 육류의 소비가 엄청나게 증가했고, 육석성 유럽이 탄생했다. 끊이지 않았던 유럽의 기아와 기근은 오히려 흑사병 이후로 인구가 다시 팽창하기 전인 적어도 100년간은 많은 사람들이 먹을거리 면에서는 마음껏 육식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축산업의 산물인 우유는 잉여 식재료로 치즈와 버터로 변환하여 전 유럽의 식탁으로 퍼져 상류층의 미식 습관에서 가장 중요한 식품으로 부상했다. 최고 품질의 치즈는 고가의 가격으로 전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흑사병 이후, 죽을 먹는 일반적인 중세의 식사 방식이 빵을 기반으로 한 식사로 대체되어 일반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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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즈는 동물성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으로 유럽인들 식생활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리코타 치즈와 같은 발효하지 않은 유청 치즈도 생산되어 파이와 수프 요리에 사용되었다. 목초지가 많은 프랑스 북부,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북부는 치즈의 생산지로 유명해졌다. 오늘날 프랑스 북부의 브리치즈(French Brie Cheese), 네덜란드의 에담 치즈(Eddam Cheese)및 이탈리아 파르마산 치즈(Italia Parmigiano Cheese)와 같은 많은 종류의 치즈가 중세 후기부터 명성을 떨쳤다.
또 다른 중요한 유제품인 버터는 중세 후반, 네덜란드와 및 스칸디나비아 남부의 축산업을 전문으로 하는 북유럽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서는 돼지 지방인 라드(lard)를 사용했지만 버터는 북유럽에서는 버터를 사용하기 했으며 이후, 북유럽 버터는 전 유럽 지역에 수출을 하기에 이른다.
중세의 주방구조와 조리서의 등장
중세 말기에 유럽은 다시 잃었던 지중해의 위치를 회복하고, 도시의 성장과 유럽의 문화의 교류로 인하여 유럽의 요리 방식은 나라마다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가장 흔한 방법은 끓이기와 빵 굽기, 로스트, 튀기기와 석쇠로 굽기 등이었다.
중세 유럽의 일반 가정에서 조리는 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거실 한가운데의 열린 난로에서 이루어졌다. 부엌과 다이닝 공간이 결합된 형식은 중세시대의 부유한 가정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배열이었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야 별도의 부엌 공간이 진화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벽난로를 벽 쪽으로 옮기고 나서 별도의 공간으로 건물에 전용 주방 공간이 들어섰다. 주방이 분리되자 조리 시의 연기, 냄새 및 번잡함이 보이지 않게 되고, 화재의 위험도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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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주방에서도 사용되는 조리기구들인 프라이팬, 냄비, 주전자 및 와플 기계 등과 같은 조리기구들의 원형이 중세 주방에서 효율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중세 시대의 많은 요리법들은 음식을 잘게 자르고, 으깨고, 양념해야 했기 때문에 조리 기술을 다양하게 펼칠 수 있는 다양한 나이프와 조리용 스푼, 국자, 강판 등도 발전했다.
왕실과 상류층의 귀족의 주방에는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에 이르는 조리사들이 고용되었다. 그들은 팬틀러(식품 저장실 관리자), 베이커(제빵 장인), 웨이퍼(제과 장인), 소시어(소스 요리사), 라더러(육류 요리사), 부처(정육업자), 카버(고기 잘라주는 요리사), 시종과 하녀, 집사 및 설거지 등 잡일을 하는 막내 하녀(Scullery maid,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의 집안일이 이와 비슷하다.)였다.
중세 유럽의 요리 관습은 요리사들이 주도했지만, 대부분의 요리사들은 이름도 남아 있지 않다. 중세 유럽의 요리사에 대한 사회적 위치는 제빵사보다도 훨씬 낮았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요리는 인간의 지식 중 종속적인 분야이고 노예에게나 알맞은 기술'이라고 서술한 걸 보면 고대의 요리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데 중세에도 이어져 왔다. 요리분야의 최고위급 경력자들은 최고의 월급을 받는 고용인이 되었지만, 권력의 상징인 지식을 후대에 문자로 전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리에 관한 저술적 의의에 큰 변혁을 가져다준 도서가 탄생되니 그것이 바로 기욤 티렐이 14세기에 쓴 '르 비앙디에(le viandier de Taillevent)'이다. 기욤 티렐은 14세기 프랑스 왕실의 전속 요리사로 프랑스 요리를 문자로 체계화시킨 최초의 인쇄본 요리서로 알려져 있다.
le viandier de Taillevent
르 비앙디에는 최초의 "고급 요리"를 다룬 요리 책 중 하나였으며, 테이블에서 준비에서부터 프레젠테이션까지의 당시의 귀족들의 식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기욤 티렐은 다양한 요리에 사용한 향신료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고급 요리에서 세 가지 주제가 되는 향신료의 사용과 육류 및 해산물의 전처리 및 조리법, 소스를 사용한 요리법들을 설명한다. 르 비앙디에는 중세 고급 요리들의 향신료가 소스를 착색하고, 맛을 변형시키는가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여 중세의 고급 요리가 얼마나 맛과 색에 중점을 두었는지 언급한다. '르 비앙디에'는 '음식을 공급하는 자'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셰프(Chef)'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의 요리사를 이야기한다. 식사와 요리에 대한 관습이 변화하는 시절 이 책은 1486년과 1615년 사이에 25번이나 재발행되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이 사회를 변화시키듯이 등자와 쟁기의 유입과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유럽의 식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중세의 유럽은 기독교라는 신학의 등장과 십자군 전쟁, 장원이라는 새로운 사회제도의 변화 속에서도 인간의 본질을 향한 새로운 시대적 흐름으로 느리지만 천천히 진보해 나아갔다. 이슬람에서 유입된 풍차와 물레방아를 중심으로 하는 기계 동력의 이용으로 유럽은 다시 새로운 세계인 르네상스의 시대로 점차적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
로마의 붕괴와 신학의 시작
근대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Arnold Joseph Toynbee)는 저서 '역사의 연구(A Study of History)'에서 문명은 '발생→성장→쇠퇴→해체'의 과정에 공통된 역사 법칙성을 구성하는 문명 사관을 전개한다.
문명의 흥망성쇠는 로마에게도 예외일 수는 없는 과정이었고, 거침없던 로마의 성장기가 지나고 로마는 서서히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로마제국의 영토확장이 지중해의 마지막까지 한계에 다다랐다. 제국의 성장이 멈추고, 군대는 전리품을 공급할 수 없게 되어 군인들의 급여를 책임질 수 없게 되었다. 로마의 경제는 정복과 정복지 노예의 노동에 기반한 경제구조로 더 이상의 정복지가 없게 되자 로마는 한계에 부딪혔다. 중앙정부는 재정적자 상태로 돌아서자 세금을 추가 징수하였고 여론 또한 급격히 나빠졌다.
기독교 신도가 늘어나자 로마는 기독교를 인정하고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기독교를 받아들였다. 로마시대의 기독교는 로마의 시민정신을 무너뜨리고 오직 하느님의 본성과 종교적 믿음에 관한 학문, '신학'이라는 하나의 길로 접어들었다.
현대의 유럽인들은 절대 인정하지는 않지만, 유럽의 종교인 기독교는 중세시대에는 이슬람에게 완패했다.
지중해에서 로마의 몰락으로 농업생산이 지속적으로 떨어지자 인구가 급격히 줄어들었다. 화폐를 매개로 거래하는 시장경제가 위기에 처하면서 도시는 문화적 우월성을 잃어버렸다. 지중해 전역의 도시를 연결해주던 문화와 교역의 네트워크가 시들해지자 로마의 귀족계층은 시골에 틀어박혀 소유지의 생산물에 기대어 생활했다. 로마의 붕괴 이후, 서유럽은 교역활동의 중심인 지중해를 사라센에게 빼앗김으로써 교환경제의 축복의 위치에서 자연 경제로 후퇴하는 결과를 맞았다.
교회와 교황은 중세 초기를 암흑의 시기로 빠트렸지만, 그리스 로마시대 이후로 교육을 받지 못한 문맹률이 높은 중세의 유럽인들은 기독교를 바탕으로 삶을 이어갔다. 제국의 멸망과 더불어 기독교의 탐식은 죄라는 덕목 때문에 고급 요리문화는 사라졌고, 로마의 요리 관습은 후세로 이어지지 못하고 끊어져 버렸다. 요리뿐만이 아니고 전 사회적으로 많은 로마의 문화와 문명의 기술들이 이어지질 못했다.
중세 초기 카를 대제가 서유럽(프랑크왕국)을 게르만족의 대 이동과 이슬람 세력확장으로부터 간신히 방어해내며 유럽의 부활을 꿈꾸었지만, 카를 대제의 사후에는 프랑크왕국도 분열되어 동프랑크(독일), 서프랑크(프랑스), 이탈리아 등 3국이 성립되며 각 지역별 문화를 이어갔다. 한편 영국에서도 색슨계의 통일 왕조가 성립되었고 유럽은 통일된 유럽이 아닌 각 지역별 고유의 기독교 문화를 만들고, 국가를 성립해 나가기 시작했다.
등자의 개발과 십자군 전쟁
서시 622년 무함마드는 아라비아에서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물결을 일으키고 무슬림이라는 새로운 공동체를 세웠다. 무슬림들은 초기 로마제국이 성장과 맞먹는 경이적인 속도로 지중해를 잠식했다. 아라비아 반도와 이집트,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지방 대부분과 로마를 제외한 시실리를 포함한 그리스 지역을 포함한 지중해 남부연안을 점령했다. 지중해는 곧 이슬람 제국이었다.
이슬람 제국이 팽창하고, 기독교 내부에서는 동로마제국과 서로마 제국의 다른 입장 차이를 보이며 성상파괴 운동이 일어났다. 이슬람의 문명과 기술은 유럽 전역에 전파되고 훗날에 스페인의 레콘키스타 운동으로 스페인을 유럽인들이 차지할 때에도 영향을 미친다. 아랍의 범선 기술이 스페인에 전수되어 스페인의 대항해 시대를 여는 기술의 서막이 된다. 12세기 이후의 중세 중기에는 국제무역과 십자군 전쟁의 영향으로 인하여 유럽은 중세 도시국가 형태로 성장한다.
유럽의 등자와 마상시합 전투 장면
로마시대까지는 말을 이용한 마차가 탈것이라면, 중세부터는 안장을 갖춘 말을 직접 타는 승마의 시대로 변화했다. 안장 없이 말을 타던 전 시대와는 달리 안장을 갖춘 말로써 비로소 실용적 승마가 가능해졌다. 그리고, 서기 8세기에 등자가 유럽에 유입되었다. 등자는 말안장에 달린 발 받침대로 등자는 말에 오르고, 말에서 균형을 잡을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다. 간단하고 편리한 도구이지만 말을 마차로 이용한 로마시대에는 발명되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서기 2~3세기부터 사용되었지만 유럽에서는 8세기에 들어서야 사용되었다. 등자가 추가되면서 말을 타고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기사 계급이 활성화되었고, 유럽 각지의 기사단들은 교황청의 주도 아래 십자군 전쟁에 참여하게 되었다. 유럽의 등자 도입은 기병 육성과 전투력 향상해, 기병은 전투의 주력이 되었고 기사 계급과 봉건주의 출현에 공헌했다.
이렇듯 등자의 유입은 중세 유럽에서 기사들이 활약 가능하게끔 하는 일등공신이라 할 수 있었다.
중세의 십자군 원정은 소요기간이 굉장히 길고 전쟁에서 살아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이 희박하다고 판단한 교황청에서는 십자군 원정에 참여한 기사들의 재산을 신의 이름으로 위탁받았다. 실제로 십자군 전쟁에 참여한 많은 기사들이 돌아오지 못했고 영지를 위탁받은 교황청은 영지관리 시스템을 운용하였고, 교황청은 이로 인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게 된다.
신형 쟁기와 장원의 발달
“기술사에 대한 이해가 심화됨에 따라 어떤 새로운 장치는 단지 문을 열 뿐 사람들을 새로운 곳으로 들어가게 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이 명백해졌다. 어떤 발명품이 수용되느냐 거부되느냐, 그리고 수용될 경우 어느 정도 그 발명의 잠재력이 실현되느냐 하는 것을 그 발명품 자체의 성격 못지않게 어떤 사회의 상황과 지도자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중세의 기술과 사회 변화’_ 린 화이트 주니어
During the ninth and tenth centuries, new agricultural techniques (the moldboard plow)
린 화이트 주니어는 그의 저서 ‘중세의 기술과 사회 변화’에서 등자와 쟁기가 바꾼 유럽 역사를 다루었다. 말에 더 밀착할 수 있는 말 받침대인 등자는 기사의 생산으로 봉건제도를 촉발시켰고, 쟁기의 개발을 통해 유럽의 농업 한계선이 보다 북방까지 상승하여 삼포식 농업(The three-field system)이 가능해지면서 비로소 봉건사회가 완성되었다고 설명한다.
남부 유럽의 토양은 느슨하고 모래가 많고 건조한 토양으로 나무 소재의 쟁기로도 경작할 수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대부분은 고대부터 중세 초기까지 도시의 성장과 제국의 번영은 남유럽을 중심으로 시작되었다. 이런 가벼운 유형의 쟁기는 북유럽의 무겁고 점토질이 많은 토양을 쟁기질하는 데는 좋지 않았다. 철제로 만들어진 튼튼한 신형 쟁기가 발명되어 북유럽에 유입되었다.
중세 북유럽의 무거운 점토 토양을 뒤집을 수 있는 신형 쟁기가 발명되자 유럽의 농경사회는 변화의 바람을 맞아다. 작은 기술 도약으로 인해 유럽의 부의 분배가 북유럽에도 축복의 바람을 불어주었다. 신형 쟁기의 발명으로 점토 토양이 있는 지역을 이용할 수 있었고, 이 무거운 점토 토양은 남유럽의 가벼운 토양 유형보다 비옥해졌다.
이러한 농업 혁명은 중세의 북유럽에까지 번영을 가져왔고 북유럽의 경제 성장과 도시의 성장에 기여했다.
유럽에 비해 더 영양질이 높은 비옥한 농토로 변화하여 수확량이 남부 유럽보다 더 좋은 기적을 낳았다. 중세의 새로운 쟁기에 의한 농업 생산력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잉여 농산물이 생겨났으며, 그 결과 전 유럽에 새로운 대도시가 탄생하는 사회 변화가 가능케 했다.
북유럽은 신형 쟁기로 인하여 농업 혁명이 일어났으며 이전보다 훨씬 더 높은 수확량과 더 효율적인 운영이 이루어지고 유럽의 경제 성장 센터가 유럽의 남쪽에서 북쪽으로 이동하는 결과를 낳았다.
Europe in the Middle Ages - Technology of The three-field system
삼포식 농업(The three-field system)은 중세와 근대까지 유럽에서 사용된 작물의 순환 체제이다. 농지를 3개의 큰 들판으로 삼등분하여 동일한 계절에 서로 다른 유형의 작물을 재배하는 농법을 말한다. 예를 들어 첫 번째 들판은 가을에 겨울 밀이나 호밀을 심고 두 번째 들판에는 완두콩, 렌즈콩 등의 콩과의 작물을 심는다. 세 번째는 들판은 휴경지로 남겨 놓는다.
이렇게 삼포식 농업으로 농작물을 경작할 경우 첫 번째 필드의 밀은 질소의 토양을 고갈시키지만, 두 번째 필드의 콩과 식물은 질소를 고정시켜 토양을 비옥하게 할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필드인 휴경지는 곧 잡초로 자라서 농장 동물을 방목하는 데 사용되었다. 또한 휴경지는 가축의 배설물로 지력을 회복하여 토양 환경이 좋아지는 효과도 나타났다. 농작물들은 순환되어 심어지게 되어 하나의 들판에서 경작되는 순환주기는 3년에 2번을 수확할 수 있었다. 농사를 짓고 휴경이 필요 없는 삼포식 농업은 북유럽 농민들이 더 많은 작물을 재배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또한, 중세에는 가축의 발굽도 개발되어 황소가 아닌 말도 경작에 이용할 수 있게 되었으며, 더 튼튼한 쟁기의 등장과 삼포제의 병렬적인 발전은 농업 생산량을 비약적으로 증가시켰다.
농작물 판매와 무역이 가능했던 중세의 경제는 삼포제 농업으로 말미암아 영주들에게 상당한 잉여와 경제 번영을 가져다주었고, 삼포식 농법은 근대 산업혁명 시대에 화학 기술이 발달하면서 질소 비료를 생산하기 전까지 계속되었다.
중세 유럽의 봉건제도의 계급
중세 유럽은 왕-영주-기사-농노 순의 계급사회와 로마의 라티푼티움(대농장) 제도를 계승하여 ‘장원’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산업체계를 갖추었다.
장원 제도가 도입되면서 영주들이 식량의 생산과 가공을 통제하면서 농민들에게 잉여생산물을 수탈할 수 있는 구조로 고착되어 갔다. 농업 생산성이 낮은 착취당하는 농민들에게 중세의 기아 현상과 굶주림은 삶의 고정적 요소로 나타났다.
15세기 초반, 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에는 중세 유럽의 고급 식사 장면을 보여주는 삽화가 있다.
그리고, 정원은 상류 귀족층에게 관심의 대상이자 막대한 투자 대상이었다. 실질적인 채소작물의 식품 공급원이었고, 원예는 귀족들의 권위와 품격을 대변해 주었기 때문이다. 중세에도 특정식물에 관해서는 교역이 많이 이루어졌는데, 일례로 프랑스가 양배추를 영국에 수출하는 문헌도 남아 있다.
계급의 사다리에서 상부를 차지하는 귀족의 빵은 희고 부드러웠으나, 사다리를 내려 갈수록 빵은 거칠고 색은 어두워졌다. 계급의 사다리에 마지막 부분의 계층은 그나마 거칠고 검은 빵도 아닌 ‘죽’을 먹었다. 기근이 일어날 경우는 돼지의 사료였던 도토리와 너도 밤나무의 열매를 대체하여 구황작물로 보충했다. 중세 유럽의 일인당 빵 소비량은 1~1.5kg으로 추정된다.
빵은 중세 식생활의 중심이 되었고, 제빵사는 중세 유럽에서는 존경받는 직업이었다.
제빵사들은 길드를 조직하고 빵 가격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법률과 규정을 만들어 통제하였다. 장원 내에서 무게를 속이거나 값이 싼 밀가루로 반죽을 하여 만든 질 낮은 빵의 가격을 비싸게 받는 제빵사들은 심각한 범죄로 간주되었다. 빵의 무게나 가격을 속인 제빵사는 빵 한 덩어리를 목 주위에 묶어 썰매를 타고 장원 지역을 끌고 다니면서 처벌을 받았다.
'금욕적인 식탁'과 '풍요로운 식탁'
로마 붕괴 이후 5세기에서 15세기까지의 1000년의 중세 식문화 규범을 단순하게 정리하기는 힘들다. 다양한 유럽 지방의 음식이 발달하기 시작했으며, 식습관과 요리방법이 도입되었으며 현대 유럽 요리의 기초를 놓았다. 밀은 통치계급을 위한 곡물이었고, 대부분의 사회 구성원들은 귀리와 보리, 호밀 등으로 빵과 죽, 파스타로 소비되었다.
중세의 기독교는 영적 이로움을 위하여 육류와 유제품을 멀리하게 하는 금육을 장려했다. 사순절 기간(에수 그리스도 부활 전 40일간의 기간)과 매주 수요일과 금요일, 토요일등을 금육의 날로 삼았다. 육신의 욕망에 관한 모든 것들 색욕이나 탐식 등을 멀리하면 영혼의 구원을 보장해 준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Limbourg brother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베리 공작의 호화로운 기도서)
하지만 유럽의 상류층의 식습관은 엄청난 양의 육류를 소비하고, 겨울에도 먹을 수 있도록 저장했다. 중세에는 신선한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사회적으로 신분의 상징이었다.
돼지고기와 사냥을 좋아하는 상류층의 입맛도 계속 이어졌다. 돼지고기는 로마 시절 이후로 유럽에서 가장 인기 있는 육류였다. 양은 양모를 얻을 수 있어 잡지 않고 키웠고, 돼지는 그런 생산품이 없었기 때문에 식용으로 알맞은 크기가 되면 바로 도살했다. 돼지고기는 저장용으로 인기가 많아 도토리와 너도밤나무 열매를 먹여 살을 찌운 후, 대개는 늦가을에 도살했다. 너도 밤나무의 열매는 밤과 비슷하지만 떫어서 먹을 수 없는 밤으로 유럽 산림에 많이 자생한다. 특히 북유럽에 속하는 독일,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산림의 20%가 너도밤나무로 조성돼있다.
중세 프랑스의 레시피에는 쇠고기가 거의 없고, 대신 돼지고기와 가금류가 지배적이었다. 그리고 고기는 어릴수록 최상의 품질이라고 생각했다. 상류계층의 식탁에 오르는 사냥감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특별구역이 지정되기도 했다. 지배계급의 사냥은 자기가 소유한 땅에서 자라나는 자연을 지배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존재를 확인하는 작업이다.
가금류는 사냥의 형태로 귀족의 식탁에 올랐으나, 소고기는 중세에는 일반적인 육류는 아니었다. 소는 목초를 먹고 자랐기 때문에 겨울을 제외한 계절은 먹이를 구하기 쉬웠지만 목초가 없어지는 겨울에는 많은 수의 소를 키우기는 힘들었기 때문이다. 건초와 사일러지를 만드는 기술이 근대에 발전해서야 소고기는 식탁에 오를 수 있는 단백질 공급원이 되었다.
북유럽에서는 바이킹 시대부터 대구와 청어 같은 생선의 소비가 압도적이었다. 말을 타면 하루 만에 바다에 도달할 수 있는 북유럽의 대부분의 지역에서는 신선한 바다 생선을 소비했다. 하지만 중부 유럽의 상류층에게 신선한 생선의 소비는 사회적 신분의 과시와도 같았다. 신선한 생선을 먹기 위해 양어지를 만들고, 신선한 생선을 확보하기 위해 대규모 투자도 이루어졌다.
4 원소설과 중세의 의학
Medieval-Middle-Ages-Health-Medicine-Disease
중세의 의사들은 그리스 시대의 아리스토텔레스 4 원소설을 받아들였다. 물질의 근원을 설명하는 4 원소(흙, 물 , 공기, 불)는 각 개인이 지닌 고유한 체질을 구성한다고 생각했다. ‘흙은 건조하고 차며, 물은 차고 습하고, 공기는 습하고 뜨거우며, 불은 건조하고 뜨겁다.’고 생각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영향을 받았다. 식재료 또한 이와 같아 음식에도 이를 적용시켰다. 중세의 의사들은 대립된 성질의 음식을 섞어먹어야만 건강에 좋다고 여겼다. 예를 들어 땅속에서 자라는 구근 채소들은 건조하고 차다고 생각했으며, 물속에서 사는 생선은 차고 습한 성질을 가지며, 뜨거운 태양 아래 건조되어 만들어지는 백포도주는 공기와 불의 성질을 지닌 건조하고 뜨거운 성질을 지닌다고 생각했다.(적포도주는 백포도주에 비해 건조도가 낮다고 생각했다.) 불로 조리된 음식은 건조하고 뜨거운 성격의 음식이라고 규정을 지었다. 현대의 요리에서 생선(차고 습한 성질)을 백포도주(건조하고 뜨거운 성질)와 먹는 관습은 고대의 의학사상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여겨진다. 따뜻한 음식과 찬 음식의 조화, 예를 들어 오븐에서 익힌 구이 요리와 물에 끓여 식힌 음식인 찬요리들의 조화는 연회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었다. 이 이론은 근대의 주방의 아버지로 불리는 ‘오귀스트 에스코피에’ 시대에도 전해져 현대 유럽의 상업적 주방을 뜨거운 요리 주방(hot production kitchen)과 차가운 요리 주방(cold production)을 나누게 된다.
현대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한의학의 사상체질이나 음양오행에 따른 식습관에 대한 믿음과 비슷하다.
과일은 유럽 전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식품으로 소비되었다. 특히 하늘과 가까울수록 신성시되는 당시의 기독교의 철학에 따라 양파와 대파 등의 구근 채소는 하류층이 소비하는 식품이었고, 나무 높이 달린 과일류는 전 유럽인이 좋아하는 식품이었다. 포도는 프랑스에서 재배되어 식용으로 소비되고 건포도가 만들어지기도 했지만, 보관성이 좋지 않은 대부분의 포도는 포도주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 시트러스류의 쓴 오렌지(당도가 좋은 현대의 오렌지는 근대에 개량하여 개발되었다.)와 레몬은 남부 유럽에서 재배되어 유럽의 상류층에게 공급되었다. 사과, 복숭아, 무화과, 체리 등도 재배되어 누구나 좋아하는 식품이 되었다. 과일 먹는다는 것은 건강에 이롭다고 생각되어 병약자들이 자주 먹었다.
설탕과 꿀은 모두 비쌌기 때문에 단맛을 요구하는 요리에는 많은 종류의 과일이 사용되는 것이 일반적인 조리법이었다.
중세 음식의 특징을 규범 하는 향신료
식품의 장거리 거래는 식품의 보존기술과 희귀성 때문에 이국적인 향신료와 수입품은 가격이 매우 비쌌다.
중세 요리의 특성은 바로 향신료의 강한 맛을 추구했다. 단순히 향이나 소화 효능 때문이 아니라, 음식의 빛깔을 입히기 위해 사용되었다. 요리책에 기록된 레시피의 70퍼센트 이상이 향신료를 사용하였으며, 이것은 상류층 요리의 특성이었다. 이런 향신료는 무역을 통하여 유럽과 아라비아를 거쳐 인도와 중국에까지 먹거리의 문화를 교류하는 교역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중세의 유럽 요리에서 향신료의 역할은 음식의 색과 향을 바꾸고, 중세 의학적 측면에서 건강한 음식을 만드는 방편이었으며, 마지막으로는 비싼 향신료를 대량으로 소비하는 자신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기 위해서였다.
특히 계피는 유럽에서 소비되는 동양의 향신료 중에서 가장 비싼 편에 속했다. 계피의 달콤한 향은 순결한 미덕을 연상시켜, 성모 마리아의 수식구로 사용되며 여러 식품과 비싼 화장품 식재료로 쓰였다.
소금은 역시 중세 세대에도 여전히 값비싼 상품이었다. 식량이 떨어질 겨울을 대비하여 식품을 보존하는데 쓰이는 귀중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식품보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건조였다. 특히 남유럽지역은 강우량이 적은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으로 곡물에서부터 과일, 육류에 이르기까지 지중해의 태양과 바람을 이용하였다. 음식의 건조는 부패를 유발하는 미생물의 활동을 줄임으로 보존성을 크게 연장했다. 염장과 훈연, 발효와 같은 방법을 병행하여 건조된 식품들은 새로운 맛으로 탄생했고, 식품의 보존을 더욱 연장할 수 있었다.
중세 시대에 후추는 냉장고가 탄생하기 이전 도살된 고기의 보관이 어려웠던 시절의 썩은 고기의 맛을 감추기 위해 사용되었다고 믿어진다. 하지만 그 주장은 가능성이 높지 않다고 생각된다. 황금만큼 비싼 후추로 고기의 악취를 가리는 것보다 새로운 가축을 구매하여 도살하여 신선한 고기를 얻는 편이 훨씬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세에도 부패한 음식을 섭취하면 몸이 아픈 것을 확실히 알고 있기도 했다. 중세의 유럽인들은 향신료를 좋아했고, 또한 향신료를 첨가하여 조리된 음식으로 본인의 권위를 과시하는 것을 좋아했다.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무역 독점으로 인한 중세시대의 후추의 엄청난 가격은 포르투갈이 인도로 향하는 항로를 찾도록 유도한 이유였다. 이후 후추는 교역량이 늘어나면서 하층계급들까지 사용하며 흔한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오늘날 후추는 일상적인 양념으로 세계 향신료 거래의 5 분의 1을 차지한다.
유럽 최대의 재앙 흑사병은 치즈의 발달을 촉진하다.
14세기 초 중세 후반의 유럽 인구가 증가하여 최절정에 이르면서 1인당 이용할 수 있는 고기와 유제품의 양도 점차 줄어들었고, 점점 더 곡류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인구의 최절정기 직후, 1348년부터 1349년까지 유럽을 휩쓴 흑사병으로 인해 유럽의 인구가 유라시아 대륙에서 최소 7500만, 최고 2억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죽었다. 재앙과 같은 흑사병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들의 식탁은 육류가 넘쳐나는 축복을 받았다. 유럽에서는 줄어든 인구에 비해 1인당 이용 가능한 동물 개체수가 상대적으로 높아져 육류의 소비가 엄청나게 증가했고, 육석성 유럽이 탄생했다. 끊이지 않았던 유럽의 기아와 기근은 오히려 흑사병 이후로 인구가 다시 팽창하기 전인 적어도 100년간은 많은 사람들이 먹을거리 면에서는 마음껏 육식을 할 수 있었다. 또한 축산업의 산물인 우유는 잉여 식재료로 치즈와 버터로 변환하여 전 유럽의 식탁으로 퍼져 상류층의 미식 습관에서 가장 중요한 식품으로 부상했다. 최고 품질의 치즈는 고가의 가격으로 전 유럽으로 수출되었다.
흑사병 이후, 죽을 먹는 일반적인 중세의 식사 방식이 빵을 기반으로 한 식사로 대체되어 일반화되었다.
the-production-of-cheese-from-tacuinum-sanitatis-second-half-of-14th
치즈는 동물성 단백질의 주요 공급원으로 유럽인들 식생활에는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리코타 치즈와 같은 발효하지 않은 유청 치즈도 생산되어 파이와 수프 요리에 사용되었다. 목초지가 많은 프랑스 북부, 독일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북부는 치즈의 생산지로 유명해졌다. 오늘날 프랑스 북부의 브리치즈(French Brie Cheese), 네덜란드의 에담 치즈(Eddam Cheese)및 이탈리아 파르마산 치즈(Italia Parmigiano Cheese)와 같은 많은 종류의 치즈가 중세 후기부터 명성을 떨쳤다.
또 다른 중요한 유제품인 버터는 중세 후반, 네덜란드와 및 스칸디나비아 남부의 축산업을 전문으로 하는 북유럽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었다. 대부분의 유럽 지역에서는 돼지 지방인 라드(lard)를 사용했지만 버터는 북유럽에서는 버터를 사용하기 했으며 이후, 북유럽 버터는 전 유럽 지역에 수출을 하기에 이른다.
중세의 주방구조와 조리서의 등장
중세 말기에 유럽은 다시 잃었던 지중해의 위치를 회복하고, 도시의 성장과 유럽의 문화의 교류로 인하여 유럽의 요리 방식은 나라마다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가장 흔한 방법은 끓이기와 빵 굽기, 로스트, 튀기기와 석쇠로 굽기 등이었다.
중세 유럽의 일반 가정에서 조리는 열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거실 한가운데의 열린 난로에서 이루어졌다. 부엌과 다이닝 공간이 결합된 형식은 중세시대의 부유한 가정에서도 가장 일반적인 배열이었다.
중세 후기에 들어서야 별도의 부엌 공간이 진화하기 시작했다. 또 다른 벽난로를 벽 쪽으로 옮기고 나서 별도의 공간으로 건물에 전용 주방 공간이 들어섰다. 주방이 분리되자 조리 시의 연기, 냄새 및 번잡함이 보이지 않게 되고, 화재의 위험도 줄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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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주방에서도 사용되는 조리기구들인 프라이팬, 냄비, 주전자 및 와플 기계 등과 같은 조리기구들의 원형이 중세 주방에서 효율적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중세 시대의 많은 요리법들은 음식을 잘게 자르고, 으깨고, 양념해야 했기 때문에 조리 기술을 다양하게 펼칠 수 있는 다양한 나이프와 조리용 스푼, 국자, 강판 등도 발전했다.
왕실과 상류층의 귀족의 주방에는 적게는 수십에서 많게는 수백에 이르는 조리사들이 고용되었다. 그들은 팬틀러(식품 저장실 관리자), 베이커(제빵 장인), 웨이퍼(제과 장인), 소시어(소스 요리사), 라더러(육류 요리사), 부처(정육업자), 카버(고기 잘라주는 요리사), 시종과 하녀, 집사 및 설거지 등 잡일을 하는 막내 하녀(Scullery maid,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의 집안일이 이와 비슷하다.)였다.
중세 유럽의 요리 관습은 요리사들이 주도했지만, 대부분의 요리사들은 이름도 남아 있지 않다. 중세 유럽의 요리사에 대한 사회적 위치는 제빵사보다도 훨씬 낮았다.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요리는 인간의 지식 중 종속적인 분야이고 노예에게나 알맞은 기술'이라고 서술한 걸 보면 고대의 요리에 대한 시각을 엿볼 수 있는데 중세에도 이어져 왔다. 요리분야의 최고위급 경력자들은 최고의 월급을 받는 고용인이 되었지만, 권력의 상징인 지식을 후대에 문자로 전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요리에 관한 저술적 의의에 큰 변혁을 가져다준 도서가 탄생되니 그것이 바로 기욤 티렐이 14세기에 쓴 '르 비앙디에(le viandier de Taillevent)'이다. 기욤 티렐은 14세기 프랑스 왕실의 전속 요리사로 프랑스 요리를 문자로 체계화시킨 최초의 인쇄본 요리서로 알려져 있다.
le viandier de Taillevent
르 비앙디에는 최초의 "고급 요리"를 다룬 요리 책 중 하나였으며, 테이블에서 준비에서부터 프레젠테이션까지의 당시의 귀족들의 식사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준다.
기욤 티렐은 다양한 요리에 사용한 향신료에 대해서도 자세히 설명한다. 그는 고급 요리에서 세 가지 주제가 되는 향신료의 사용과 육류 및 해산물의 전처리 및 조리법, 소스를 사용한 요리법들을 설명한다. 르 비앙디에는 중세 고급 요리들의 향신료가 소스를 착색하고, 맛을 변형시키는가에 대해 자세히 서술하여 중세의 고급 요리가 얼마나 맛과 색에 중점을 두었는지 언급한다. '르 비앙디에'는 '음식을 공급하는 자'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셰프(Chef)'라는 단어가 없던 시절의 요리사를 이야기한다. 식사와 요리에 대한 관습이 변화하는 시절 이 책은 1486년과 1615년 사이에 25번이나 재발행되었으니 그 인기를 짐작할 수 있다.
새로운 기술이 사회를 변화시키듯이 등자와 쟁기의 유입과 새로운 기술의 발전은 유럽의 식탁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중세의 유럽은 기독교라는 신학의 등장과 십자군 전쟁, 장원이라는 새로운 사회제도의 변화 속에서도 인간의 본질을 향한 새로운 시대적 흐름으로 느리지만 천천히 진보해 나아갔다. 이슬람에서 유입된 풍차와 물레방아를 중심으로 하는 기계 동력의 이용으로 유럽은 다시 새로운 세계인 르네상스의 시대로 점차적으로 걸어 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