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주차. 로마시대의 미각과 위생

로마시대의 미각과 위생 


'서기 80년, 당시 최고 건설기술인 철과 시멘트를 사용하여 로마 중심지에 건설된 대형 원형경기장 로마의 콜로세움으로 입장하는 8만 명의 시민들이 있다. 이들은 모두 로마 시민임을 상징하는 길이 6m의 천으로 구성된 토가(toga)를 멋지게 두르고 있었다. 원형 면적 24,000제곱미터의 경기장에는 각 층별 동서남북 부분별로 입장과 퇴장을 할 수 있는 아치의 대형 문들이 있다.  곧 8만 명의 시민들이 입장을 마치고 경기장 안에 있는 안에  열광하는 소리가 경기장 밖으로까지 퍼져 나간다.  원형 경기장 안에는 도르래 장치를 이용한 오늘날의 엘리베이터와 같이 자동으로 문이 열리며 지하와 지상을 연결하는 통로가 움직이고 있었다. 곧 지하에서 올라온 맹수와 검투사들이 혈전을 벌이고 시민들이 환호하고 있었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저자인 아서 C. 클라크는 ‘충분히 발달된 기술은 마법과 구분할 수 없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과학과 기술이 극단적으로 발전할 때의 상황을 묘사한 것으로,  당시의 로마 문명을 타민족이 보았다면 이렇게 감정을 표현했을 것이다.

당시의 로마의 기술력은 가장 발달한 고대 문명으로 몇몇 기술들은 19세기 산업 혁명 이전까지의 높은 기술 수준을 고대 로마시대에 완성하였다. 새로운 에너지인 수력과 석탄 등을 개발하고 사용하였으며, 토목공학과 건축기술의 개발로 유럽 전역에 도로와 수로를 설치하였으며, 운송기술과 다양한 기구와 기계의 발명으로 로마제국을 건설하였다.

10.4-metre-high Roman construction crane, 로마시대의 건설용 크레인 복원

로마는 도시국가에서 공화국, 그리고 제국에 이르는 동안  여러 차례 로마인의 요리는 진화한다. 이탈리아 중부의 새로운 땅에 정착했던 로마인들의 식문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로마의 독특한 특성들, 예를 들어 지역, 기후, 정치, 경제에 대한 배경을 살펴보아야 한다.  

 테베레강에 인접한 언덕마을의 연맹체로 출발한 로마의 경제기반은 지중해성 기후를 바탕으로 하는 목축과 인근 평야를 공동으로 경작하는 것이었다. 공동경작은 공공의 것을 뜻하는 ‘레스 푸블리카(공화국)’이라는 정치적 개념의 기원이었다. 기원전 3세기 무렵 탈곡하기 쉬운 밀 품종이 생겨나면서 로마의 밀생산량이 급등해 밀 교역이 늘어났다. 초기 로마가 점차 거대 도시로 변모함에 따라 식량, 특히 수입밀에 대한 의존도가 점점 높아졌다.

초기 로마는 북아프리카 카르타고의 명장이라고 불리는 한니발과의 포에니 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북아프리카의 곡창지대를 점령하게 된다. 포에니 전쟁의 승리로 카르타고가 지배하던 북아프리카 곡창지대는 무러무럭 성장하는 로마 공화정의 곡창지대가 되었다. 후에  로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쟁에서 승리하며 루비콘강을 건너며  원로원 시대를 마치고 황제와 제국의 시대로 들어선다. 카이사르는 로마보다 앞선 지금의 프랑스 지방인 갈리아의 농경문화를 받아들이고 갈리아-로마 문화를 꽃피웠다. 이때 많은 식물과 채소, 과일의 이름을 갈리아 말에서 유래했다. 이로 인해 로마의 식문화는 새로운 식재료로 인해 새로운 로마식 식문화를 만들어 냈다.     

로마는 그리스의 문화를 존경하며 그들의 철학과 과학, 문학과 신화까지 헬레니즘의 문화는 그대로 로마에 전승되고 받아들여졌다. 베르길리우스가 지은 로마 창조의 서사시 아이네이스(Aeneis)는 그리스 호메로스의 일리아스(Ilias)를 모방했으며, 오비디우스가 만들어낸 서사시 변신(The Metamorphoses)은 그리스 헤시오도스의 신들의 계보(Theogonia)를 모방해 로마 신화로 재창조했다. 오늘날 지중해 식단이라고 불리는 빵과 올리브 오일, 와인을 고대 그리스로부터 그대로 받아들이고 산업화하며 발전시켜 나갔다.  

로마는 소금과 제국의 무역, 군인들을 위한 15만 km의 포장도로를 건설했다. 고대 로마의 도로는 인도와 차도가 구분이 되었고, 가장자리에 배수로도 설치되고 횡단보도도 있었다고 하니 오늘날만큼 실용적이고, 꼼꼼한 설계가 돋보인다. 당시의 닦여진 도로가 아직도 유럽에서 사용되고 있다고 할 정도로 견고하다. 로마의 수도시설은 평균 40km의 거리의 수도교를 통해 수로를 만들어 총 9곳의 취수원에서 물을 끌어다 썼다. 이런 수도시설은 로마뿐 아니라 로마의 모든 식민도시에 건설되어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유럽 전역 프랑스, 스페인은 물론이고, 영국과 카르타고 지역인 북아프리카에도 건설되었다.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이 있듯이, 그리스에서 과학과 예술을 흡수하고 페르시아에서 수학을 얻어내어 천년 제국을 건설했다. 로마는 법과 제도를 정비한 정치제도를 뿌리내렸으며 다양한 민족과 문화를 포용하여 통일된 지중해의 문명과 유럽을 통합한 제국을 이룩했다.



발달된 수로와 로마의 위생 시설


농사를 위해서는 곡식이 자라는 기름진 땅과 뜨거운 태양이 있어야 하며 그리고 물이 필요하다. 대지에 넉넉한 물을 농경지에 공급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도시 역시 물이 있는 곳이  곧 삶의 터전이 되므로 수자원은 필수적이었으므로 고도화된 문명을 좌우하는 것은 물을 다스리는 능력이었다. 상하수도, 목욕탕, 세탁소, 빵집과 술집이 즐비한 거리들, 로마는 이 모든 것이 존재하는 인구 100만의 도시였다.

로마의 행정당국은 발달한 수도망을 통해서 도시에 물을 공급하는 일에도 주의를 기울였다. 수도 기관으로 공공 분수까지 물을 끌어오고, 드물게는 지배층의 거주지까지 물길을 연결했다. 하지만 당시 수도관은 납으로 되어 있어서 많은 로마인들이 납중독으로 인한 통풍으로 고생했고 전해지는데 사실이 아니라는 주장이 최근 등장했다. 수도관으로 납을 사용한 구간은 수도교에서 공동수조까지 짧은 거리에 불과하며, 유럽의 물 특성상 물에 석회질이 많이 있어 납관 내부에 석회질이 코팅되듯 쌓여서 납 성분이 거의 포함되지 않는다고 한다.  

로마의 공중화장실 유적과 테르소리움(tersorium)

로마에는 상수도용 지하수도가 존재하는데, 수로가 통과한 물은 공중목욕탕과 황궁으로 전달되었다. 공중목욕탕은 오늘날과 같이 냉탕과 온탕으로 구성되어있었고 역시 제국의 곳곳에 건설되었다. 목욕탕 옆에는 공중화장실도 설치되어있었는데, 나란히 앉아서 용변을 볼 수 있는 기다란 의자 구조로 변기 부분이 구멍이 뚫려있고 그 밑으로는 목욕탕에서 사용한 물이 지나가는 구조였다. 재미있는 사실은 용변을 보고 난 후 테르소리움(tersorium)이라는 막대기 끝에 바다에서 나는 천연 스펀지를 사용해 닦았다고 한다. 사용 후에는 식초나 소금물이 담겨있는 통에 헹구고 공동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식수는 보통 끓여서 식히거나 따뜻한 상태로 썼는데, 물에 식초를 섞어 포스카(pocca)라는 음료를 만들어 마시기도 했다. 포스카는 로마의 군인들이 일상적으로 마시는 음료였기 때문에 식초는 늘 군용 식량으로 지급되었다. 로마시대의 상수도의 보급은 로마인들의 건강에 혁명적인 공을 세웠다. 깨끗한 물은 치명적인 수인성 전염병의 위협에서부터 안전한 물의 공급으로 인해 로마인들의 수명연장과 건강한 삶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라티푼티움(대농장)과 와인의 대량 생산


카르타고를 정복한 로마인들은 카르타고 땅에 자라는 여러 가지 곡물을 보고 경탄했다. 또한 소를 육종하는 방법을 개발했으며 포도재배 기술과 포도를 말려 포도주를 생산하는 기술을 알고 있었다. 로마인들은 카르타고인들이 개발한 농경기술을 받아들였다. 카르타고의 농경학자 마고(Mago)가 쓴 농사 교본을 로마어로 번역하고 농업의 아버지라 칭송했다.  다양한 농경기술의 발전으로 로마의 식문화는 변화의 기회를 맞는다.   

로마는 대부분의 그리스의 음식문화를 포용하며 지중해 식단이라고 불리는 식재료들을 받아들였다.  로마인들은 올리브, 포도, 케이퍼, 아스파라거스, 양배추, 마늘, 양파, 오레가노, 바질 등 지중해 동부가 원산지인 다양한 채소들을 그리스에서 들여왔다. 그리고 발달한 재배기술도 함께 들여왔으며,  빵, 올리브, 와인을 중시하는 문명화된 그리스인들의 식단을 들여왔다.      

밀농사와 포도주나 올리브유의 생산은 정착 농경과 직결되므로 자연경관을 바꾸어 버리는 힘을 가진다. 바로 이 자연의 힘을 바꾸는 힘이 눈에 보이는 문명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였다.  

Dominus Julius mosaic in the Bardo National Museum


로마의 농업체계는 벽돌을 쌓아놓은 듯한 경작지에 수로로 경계를 나누고, 과수원, 포도밭 용도로 울담을 쳤으며, 채소용 정원을 나누어 교통과 교역을 보증하는 광대한 도로망을 갖추었다. 로마인 대지주들의 소유인  이런 형태의 대단위 농장들을 라티푼티움(Latifundium, 대농장)라고 부르고, 이곳에서 포도를 기르고 와인을 대량 생산했다. 로마인들은 좋은 와인에 대한 열광적인 관심을 드러냈으며, 제국이 확대되면서 와인을 생산하는데 필요한 기술에 그들의 지식과 노력을 집중했다. 와인 제조에서 보여줬던 로마인의 근성은 농업과 식품기술에서 나타나 그들은 실험을 반복하고 그 지식을 개선시키고 널리 확산시켰다. 와인의 상업적 가치가 치솟고 지중해 전역에서 수요가 급증하자, 매우 조직적인 대량생산이 이루어졌다. 이런 형태의 농장들은 중세로 이어져 장원 제도가 되고 봉건제의 효시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라티푼티움에서 자란  여러 가지 채소와 허브, 아몬드, 체리, 복숭아 등의 과실수는 북부 유럽에까지 소개된다.



소금과 빵집, 그리고 새로운 로마인의 입맛 가룸(garum)


소금은 식품보존을 위한 필수품이었고, 초창기 로마가 발전에는 소금이 중요한 발전 요소였다. 테레베 강 하구에서 생산해서 아벤티노 언덕 아래 소금창고에 비축해둔 소금으로 초기 로마인들은 상당한 수익을 올렸다. 소금 생산기술은 로마의 중요한 사업으로 식민지 시칠리아와 사르데나에서 염전 사업으로 로마의 수입원이 되었다. 이 시기에 카르타고의 동전에도 참치 모양이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거대한 어망을 이용하는 세련된 어업 기술로 참치잡이도 활발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바엘로 클라우디아에 위치한 거대한 가룸 생산 시설 Garum brewing vats

이후, 염전을 개발하고 자염 생산을 바탕으로 소금길(Via Salaria)을 만들어 전 유럽을 정복했다. 인간은 소금을 먹지 못하면 수분과 체액의 농도, 영양소 불균형 등으로 사망에 이른다. 바닷물을 증발시켜 만든 로마의 자염(煮鹽)과 달리 북유럽에서는 일찌감치 소금 광산이 발달하여 암염(岩塩, rock salt)을 소비하였다. 암염이란 지구의 지각운동으로 바다였던 지역이 일정 지역에 갇히게 되면서 염전 호수가 되고 증발, 퇴적되어 소금이 광물의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다. 소금광산은 유럽에서 독일, 스페인, 루마니아, 프랑스에 존재하여 전 유럽에 소금 창고 역할을 하였다. 로마인들은 중부 유럽의 캘트인으로부터 광물에서 소금을 추출하는 기술을 받아들이고 그곳을 소금(salz)과 성(burg)을 합쳐 잘츠부르크(Salzburg)라고 불렀다. 소금길은 유럽의 무역과 부를 흡수하여 로마제국을 건설하는 1등 공신 역할을 한다. 그리고 잘츠부르크 지역의 소금을 돼지고기에 절여 보존하는 기술인 건조 햄과 소시지를 높이 평가하고 그들의 가공기술도 배워왔다.

초기 로마인들은 생선을 잘 먹지 않았으나 공화정 말엽이 되어서야 나폴리 인근 해안에서 바다고기와 굴 양식을 기반으로 해산물을 소비하였다. 이후, 생선은 누구나 탐내는 훌륭한 음식으로 고기보다 더 비쌌다고 전해진다.

에스파냐의 진보한 염장 시설들에서 상품가치가 별로 없던 작은 생선들에 소금을 첨가하여 만든 가룸(garum)을 가져온다. 이후 로마 요리사들에게 가장 흔하게 사용된 향신료는 가룸이라고 불리는 발효시킨 생선소스였다. 현대의 유럽 요리에서는 인기 있지 않은 액젓이 로마시대에는 가장 인기 있는 향신료로 사용되었다. 현대의 멸치를 소금에 절인 앤쵸비를 연상하겠지만 가룸과 다르다. 앤쵸비는 소금에 절인 멸치와 올리브 오일을 활용하는 것이고, 가룸은 액젓 그 자체이다. 가룸은 로마제국 전역에서 생산되었고 아시아의 피시소스처럼 품질과 맛, 투명도와 색에 따라 가격이 결정되었다. 고급 가룸은 우리나라의 고급 멸치액젓과 비슷하고 바다의 풍미가 느껴지는 짭짤하고, 미묘한 향미가 풍부한 황금빛 액젓이다.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의 곡창지대에서 생산된 풍부한 밀과 그리스의 제빵 기술을 이어받아 이제 빵은 로마에서 흔히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되었고, 로마인들의 정체성을 이루는 핵심 요소로 간주되었다. 빵을 만드는 일은 피스토레스(pistores)라고 불리는 전문 제빵사의 몫이 되었다. 이들은 국가가 직접 관리했다. 빵은 그 특성상 만들기 매우 번거롭기 때문에 서양 문화권에선 일찌감치 고대 이집트 시대부터 동네마다 빵집이 들어섰다. 이는 빵의 재료가 되는 밀가루를 개인의 힘으로 얻기 힘들다는 점까지 겹친 결과다. 특히 목조 가옥이 주류인 북유럽은 화재 위험 때문에 아궁이는 난방 겸 고기를 굽거나 저장식을 훈제하거나 수프를 끓이거나 하는 정도로 쓰임새가 제한되었고, 전통적으로 빵은 대개 빵집에서 팔거나 마을 공동 화덕에서 구웠다.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일은 까다로운 일이었다. 밀이 군용 식량을 구성하는 주요 곡물이었는데, 보통 곱게 갈아서 딱딱하게 구운 건빵을 만들어 먹었다. 올리브유와 소금도 일정량 배급되었는데 군용 식량으로 지급하는 소금을 살라리움(salalium)이라고 했다. 이 말이 봉급을 의미하는 샐러리(salay)의 어원으로 추정된다.      


             

돼지고기를 좋아하는 로마인들의 입맛


로마인들은 이미 소박한 생활을 벗어나 거대 제국과 세계적 수준의 요리로 발전하는 중이었다. 이런 요리 관습은 제국의 시민들이 앞다투어 선택했고 지금도 여전히 지중해와 유럽 음식 문화의 기반이 되고 있다. 로마로 건너온 그리스인 요리사들은 놀라울 정도로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방과의 접촉도 그만큼의 위력을 발휘했다.

로마인들은 집집마다 소금에 절여 말린 돼지고기와 치즈, 꿀, 올리브 같은 식품을 저장해 두었다.  


The Housing of the Poor - Insulae

하지만 로마 빈민의 생활여건은 매우 척박했다.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는 ‘풍자 시(satire) 2편’에서 그 유명한 시골쥐 이야기를 통해 이런 전통적 가치관을 피력했다. 도시 쥐가 시골쥐를 풍요와 사치로 꾀어 도시로 오게 하지만, 정작 시골쥐가 깨닫게 된 것은 실상 도시의 삶이 시골의 삶보다 훨씬 더 위험한 사실이었다.   

실상 초기 로마인들은 육식을 거의 하지 못했으며, 가금류나 돼지, 양을 소비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인술라(insulae)라는 커다란 건물에 여러 가구가 북적대며 살았고, 이들은 화재위험 때문에 집안에 부엌을 둘 수가 없어서 대부분 밖에서 식사를 했다. 테르모폴리움이라고 불리는 요즘으로 치면 테이크 아웃 음식을 파는 곳에서 음식을 사서 먹었고,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은 집에서 준비한 음식을 노예에게 들려서 데리고 다녔다. 대중음식점도 있었는데 타베르나(taberna)라는 식당에서는 음식과 와인을 다 사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오늘날 서양문화에서 선술집으로 불리는 테번(Tavern)으로 남아있다. 실제로 폼페이 유적에서 발견된 96개의 거리 중 60개 거리가 식당과 선술집이 차지하고 있었다고 하니 인구 백만의 로마의 유흥가는 요즈음의 홍대와 다르지 않았다.

생선시장과 도살장과 고기를 파는 정육점이 생겨났다. 로마인들이 가장 좋아한 육류는 단연 돼지고기였다. 서기 1세기 로마의 정치가이자 작가인 플리니우스 돼지고기를 이렇게 찬양한다.

‘사람 입에 돼지보다 더 다양한 맛을 전해주는 동물은 없다. 다른 동물의 고기 맛은 단 하나뿐이지만 돼지고기는 50여 가지의 다양한 맛을 낸다.’

도시인들은 돼지고기 다음으로 쇠고기와 양고기를 좋아했다. 경작이나 노동을 하다가 늙어서 퇴출된 동물들이 아니라 처음부터 식용으로 도살된 가축을 육류시장에 팔았다. 고기 품질이 형편없어도 동물의 전 부위를 다 식품으로 활용했는데, 이는 고기가 대다수의 사람들의 식단에 있어 중요한 구성요소임을 암시한다.  돼지고기에서 나온 지방, 피와 육류 부산물들은 돼지 위와 창자 속에 채워 소시지로 만들어 훈연시키거나 구워 먹었다. 돼지는 버릴 것이 없는 육류였다.

로마인들은 연고가 없는 도시에 가면 호스피티아(hospitia)라는 여관에 묶었다. 호스피티아에는 방과 식사, 마구간을 제공했다. 대부분 도시의 성문 근처, 아니면 광장이나 공중목욕탕, 극장 등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장소와 가까운 곳에 있었다. 호스피티아는 오늘날 환대산업과 병원의 어원이 된다. 환대산업은 호텔, 음식 서비스, 카지노, 관광에 제한하지 않고 넓은 범위의 다양한 서비스 산업을 통틀어 부르는 용어이다



콘비비움(convivium)


역사학자 엔드루 돌비는 '로마인들은 그리스나 동방에서 온 요리사를 채용하거나, 비싼 값을 치르며 그리스나 동방의 진미를 사들이고, 음식과 요리에 그리스 음식을 붙이면서 그리스와 동방의 사치를 모방하려는 욕망을 거리낌 없이 드러낸다.'라고 당시의 로마인들을 평가했다.  콕토르(coctor)나 코쿠스(coquus)로 불리는 직업 요리사가 상류사회에서 인기를 끌게 된다. 오늘날 요리사를 뜻하는 쿡(cook)의 어원이다.     

키케로는 로마인은 개인적 사치는 증오했으나 공동의 풍요는 찬성했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제국화 된 덕분에 생활이 윤택해지자 식사 자체도 복잡해지고 풍요로워졌다.

폼페이의 벽화에 ‘나와 같이 식사를 못하는 이가 있다면, 그자는 나한테 있어 야만인이다!라고 쓰여있다. 로마에서는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것은 우정, 인정, 유대감을 의미했다.      

로마인들에게 저녁식사는 하루 중 가중 중요한 식사였다. 로마인들은 공동체를 융합하는 과정에서 환대와 친교의 중요성을 알고 있었다. 디너는 여유롭게 음식과 친교를 나누는 중요한 행사였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디너를 콘비비움(convivium)이라 불렀다. 콘비비움은 ‘함께 살아가다’라는 뜻이다. 이로써 로마인들은 ‘함께 술을 마시다’라는 뜻의 심포지엄으로 공동체의 즐거움을 만끽했던 그리스인들과 자신들을 의식적으로 구별했다. 그래서 디너는 일종의 콘비비움, 즉 음식과 와인이 더불어 친목을 도모하는 공간이자 시간이 되었다.

초기 로마인들은 앉아서 식사를 했지만 그리스 풍습의 영향을 받아서 공식 만찬에서는 옆으로 기대어 누워서 식사를 했다. 당대의 풍속을 보여주는 그림이나 부조를 보면 여자도 식사 때 비스듬히 누운 자세를 취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음식은 맨손으로 먹어야 했기 때문에 쉽게 집어먹을 수 있는 크기로 잘라서 나왔다. 손을 씻을 수 있도록 깨끗한 물을 담은 항아리도 놓아두었다. 모든 음식은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나왔기 때문에 그들은 손으로 음식을 먹었다. 포크가 디너 테이블에 등장한 것은 그로부터 약 1000년 후였다. 당시 사람들은 다양한 크기의 스푼만을 도구로 사용했다.

음식은 다리가 셋 달린 낮은 원형 탁자에 올려져 있었다. 연회는 달걀, 굴, 샐러드와 같은 전채가 나오면서 시작된다. 그리고는 고기와 채소로 이루어진 주요리가 나오고, 무화과, 과일, 견과류가 나왔다. 때때로 그리스의 향연을 본받아 술잔치를 벌이며 자신들의 위계적 질서와 사회적 연대를 다졌다.


페데리코 펠리니의 영화 사티리콘(1969) 트리말키오가 주최한 콘비비움 장면

향락적 콘비비움을 묘사한 최고의 작품은 고대 로마 네로 황제 시대의 작가 페트로니우스가 지은 풍자소설 ‘사티리콘(satyricon)이다. 주인공은 트리말키오(Trimalchio)로 노예 출신의 갑부로 본래 부잣집의 노예였으나, 주인의 환심을 얻어 그의 심복이 된 후 그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아 어마어마한 벼락부자가 되었다. 낮은 신분에서 출세했다는 과거에 대한 보상감 때문인지 과시욕이 매우 강해 막대한 돈을 들여서 사치스러운 연회를 베푸는 것을 즐긴다.

우리에게 영화 '길'로 잘 알려진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은 세계문학사상 가장 유명한 식사 장면으로 꼽히곤 하는 ’사티리콘‘의 연회 장면을 걸작으로 만들어졌다. 페데리코 펠리니 감독의 사티리콘은 그 당시 영화 벤허와 클레오파트라 정도의 제작비를 투여한 컬트영화로 로마시대의 화려하고 변태적이기까지 한 연회를 묘사한다. 피츠제럴드의 '위대한 개츠비'는 이 작품으로부터 적지 않은 영향을 받았다. 주인공 개츠비는 트리말키오에게서 기본적인 모티브를 따온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피츠제럴드는 이 소설의 제목을 '웨스트 에그의 트리말키오'로 정할까 고민했다고 전해진다.      



아피키우스(Apicius)의 데 레 코퀴나리아(De re coquinaria) 

    

로마는 그리스의 식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들만의 새로운 몇몇 문화를 창조했는데 가장 독창적인 것이 미식학이었다. 로마는 음식과 식사에 대한 문학적 고찰을 추가했다. 모든 것을 문헌으로 남겼다는 로마였지만 유감스럽게도 라티어로 된 요리서 문헌은 현재 존재하지 않는다. 다행히도 단 하나 남은 게 있으니 아피키우스의 데 레 코퀴리나 이다. 요리에 관하여라는 뜻인 ’데 레 코퀴나리아(De re coquinaria)도 제정시대 음식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다. 1세기 티베리우스 황제 시대에 살았던 이름난 미식가 아피키우스(Apicius)가 다양한 요리법을 모아 엮은 책인데, 실상 이 책은 2~4세기에 편집된 것으로 보인다. 여기에는 소시지나 풀스, 밤 같은 일반음식이 많이 나오지만 타조, 낙타, 후추 같은 이국적인 재료도 거론된다. ‘데 레 코퀴나리아’에는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는데, 조리법에는 값비싼 양념과 향신료를 이것저것 섞어 넣으라고 쓰여있는 경우가 아주 많다는 것이다. 이런 풍조는 주인의 부를 과시하면서 자기가 고용한 요리사의 기술과 자신의 세련된 취향만을 자랑하느라고 생겼을 것이다. 이 조리서 모음서는 개략적인 내용만 소개할 뿐 요리과정과 재료를 자세히 설명하지는 않는다.        

  

아피키우스(Apicius)의 데 레 코퀴나리아(De re coquinaria)

다행히 로마시대의 다양한 유적들에서 그 시대의 조리시설들을 엿볼 수 있다. 고대 주방에서 발견된 조리 기구들은 오늘날 우리가 서양 조리 주방에서 사용하는 기구들과 너무 비슷하다. 긴 손잡이가 달린 프라이팬, 소스 냄비, 가마솥 등 대개 청동 기구와 점토로 구운 질그릇이다. 고고학적 증거로서 주방기구 수집물 중에는 청동 국자, 숟가락, 다양한 크기의 철제 칼, 치즈 강판, 스트레이너, 고대의 필수 만능 ‘음식처리기’인 막자사발(모르타리움, mortarium)이 있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주방에서 카레를 만들 때 쓰는 돌절구와 비슷하다. 인도와 동남아시아 음식에서 커리를 제조할 때 돌절구에 향신료들을 혼합 분쇄한다.  실제로 아피키우스의 레시피의 여러 가지 향신료를 쓰려면 모르타리움이 없이는 절대 만들 수 없다.    

고대 로마시대의 이탈리아 요리에는 토마토, 감자, 피망, 가지, 오렌지도 없었고, 현대의 이탈리아에 가장 유명한 3가지 요리 스파게티, 피자, 티라미슈는 고대 로마의 메뉴 리스트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이렇듯 우리가 생각하는 전통적인 음식과 고대의 음식들은 많이 다르다.  고대 로마로부터 전해지는 지중해 식단이란 오늘날에도 끓임 없이 진화하고 있으며, 지중해 식단 자체는 일종의 ‘문화적인 가공물’이라는 사실을 유념할 필요가 있다.제국의 흥망성쇠가 있듯 후기 로마는 쓰러져가는 제국의 몰락을 보여주는데, 인구의 급격한 감소와 생산과 교역에 심각한 붕괴를 보여준다. 이로써 일상적 음식 관습과 습관도 상당한 변화가 일어났다. 로마 후기 영혼과 사후를 중시하고 몸의 쾌락을 비난하는 색채를 가진 새로운 기독교적 이데올로기가 등장하면서 로마시대의 연회 문화는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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